문#1 한 장의 초상화에서 시작된 사랑

(Infantin Margarita in weißem Kleid), 1656년경 빈 미술사박물관 소장
빈 미술사박물관의 스페인 회화실에 들어서면 한 어린 공주와 눈을 마주치게 된다. 금빛 머리와 풍성한 드레스, 어딘가 낯설면서도 익숙한 얼굴. 그녀는 단순한 왕실의 아이에 그치지 않는다. 유럽의 운명을 바꾼 결혼의 중심에 서 있었던 소녀, 마르가리타 테레사다.
흥미로운 것은 이 그림이 왕실 초상화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는 점이다. 한 황제가 무려 15년 동안 기다려 온, 미래의 황후를 기록한 이미지다. 그리고 훗날 세기의 로맨스로 불리게 될 결혼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마르가리타 테레사의 이름을 세계에 각인시킨 작품은, 프라도 미술관을 대표하는 벨라스케스의 걸작 《시녀들》(Las Meninas)이다. 화면 중앙에 서 있는 어린 공주가 바로 그녀다. 그림 속 인물들의 시선은 모두 한 방향으로 흐르고, 그 끝에는 어린 공주가 서 있다. 시녀와 신하들, 그리고 공간의 질서까지도 그녀를 중심으로 재편된다. 이는 그저 궁정의 풍경이 아니다. 어린 공주가 스페인 왕실의 마지막 희망이었음을, 그리고 왕가의 미래가 그녀에게 달려 있었음을 보여 주는 장면이다.

1653–1659년, 빈 미술사박물관 소장. 2세, 5세, 7세 시기의 모습이 담긴 초상화들이다.

1653–1659년, 빈 미술사박물관 소장. 2세, 5세, 7세 시기의 모습이 담긴 초상화들이다.

1653–1659년, 빈 미술사박물관 소장. 2세, 5세, 7세 시기의 모습이 담긴 초상화들이다.
공주의 탄생 소식이 전해지자 빈 궁정은 술렁였다. 자손이 귀했던 두 합스부르크 가문을 다시 결혼으로 이어줄 희망이 생겼기 때문이다. 황제 페르디난트 3세 역시 외손녀의 탄생을 크게 기뻐하며 “내 소원은 그 공주를 한 번 보는 것이다”라고 했다 한다. 그러나 그는 그 바람을 이루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궁정 화가 벨라스케스는 공주의 성장에 맞춰, 두 살과 다섯 살, 그리고 일곱 살의 모습을 차례로 초상화에 담았다. 사진이 없던 시대에 왕실 초상화는 예술 작품에 머물지 않았다. 그것은 왕가의 동맹과 결혼 약속을 확인하는 외교 문서이기도 했다. 스페인에서 완성된 공주의 초상화는 외교 사절의 손을 거쳐 오스트리아 빈 궁정으로 전해졌다.
공주가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스페인과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은 혼인 동맹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상대는 어머니의 여섯 살 어린 남동생이자 외삼촌인 레오폴트였다. 훗날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는 인물이다. 그는 열여덟 살에 황제로 즉위한 뒤, 얼굴도 목소리도 모른 채 초상화 속에서 자라나는 어린 약혼녀를 기다려 왔다. 마침내 그들의 결혼이 이루어졌을 때 마르가리타 테레사는 열다섯, 레오폴트는 스물여섯이었다.
“Bella gerant alii, tu felix Austria nube.”
(다른 이들은 전쟁을 하게 하라. 너, 행복한 오스트리아여, 결혼하라.)
이 문장은 결혼을 통해 유럽의 지도를 바꾸어 온 합스부르크 왕가의 혼인 외교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격언이다. 그러나 그 화려한 정치의 이면에는, 근친혼이 남긴 유전적 비극이라는 또 다른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왕가의 자녀들에게 왕관은 축복이면서도, 동시에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던 것이다.

(Infant Baltasar Carlos), 1638-1639년경, 빈 미술사박물관 소장
당시 스페인 국왕 펠리페 4세는 왕세자 발타사르 카를로스의 요절과 왕비의 사망으로 심각한 후계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왕실의 존속이 흔들리자 그는 혈연 동맹을 유지하기 위해 오스트리아로 시집간 누이의 딸, 즉 자신의 조카 마리아나와 재혼한다. 삼촌과 조카라는 이례적인 결혼에서 태어난 아이가 바로 마르가리타 테레사였다.
프랑스의 루이 14세가 세력을 확장하며 유럽의 균형을 흔들던 시대, 그녀의 탄생은 두 합스부르크 가문의 결속을 다시 이어 주는 계기가 되었다. 공주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정치적 의미를 지닌 존재였고, 캔버스 속에서 성장한 그녀에게 결혼은 자신의 자리를 증명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1666년, 마르가리타 테레사는 스페인을 떠난다. 아버지 펠리페 4세를 막 잃은 뒤였다. 어린 남동생 카를로스 2세는 네 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고, 어머니 마리아나는 섭정으로 나라를 이끌어야 했다. 공주에게는 슬픔을 애도할 시간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그녀는 그렇게 제국의 황후가 되기 위한 길에 오르게 된다.

1685년경, 빈 미술사박물관 소장. 스페인 합스부르크 가문의 마지막 국왕이다.
오스트리아까지는 여섯 달에 이르는 긴 여정이었다. 여러 도시와 국경을 지나며 그녀는 자신이 태어난 고향과 가족으로부터 점점 멀어져 갔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공주에게 결혼은 개인의 선택이 아니었다. 열다섯의 소녀에게 그 길은 결코 가벼운 시간이 아니었을 것이다.
알프스를 넘어 합스부르크 영토의 관문인 인스브루크에 도착했을 때,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한 사람이 있었다. 수도 빈이 아니라 서쪽 변경까지 직접 나와 소녀를 맞이한 황제 레오폴트 1세였다.

(Portrait of Emperor Leopold I) 1672년경, 개인 소장

1666년경, 마드리드 프라도 박물관 소장
검은 상복을 입은 마르가리타의 초상은 슬픔을 드러내는 동시에, 결혼을 앞둔 공주의 현재 모습을 전하기 위해 제작된 정치적 이미지였다. 레오폴트 1세는 초상화가 도착할 때마다 그 안에서 조금씩 자라나는 소녀의 변화를 차곡차곡 마음에 쌓아 왔다. 그리고 마침내 그림 속 인물이 그의 앞에 서게 된다.
그녀가 처음 마주한 신랑은 어머니의 동생, 외삼촌 레오폴트였다. 낯선 타국의 군주라기보다 오래전부터 이름으로만 알고 있던 가족에 가까운 존재였다. 공주는 마중 나온 황제를 향해 웃으며 다가갔다.
“외삼촌(Onkel)!”
그 한마디로 정략결혼의 긴장이 단번에 풀렸다. 황제가 소녀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서자 두 사람 사이에 존재하던 간극이 사라졌다. 그러나 이 만남은 사적인 영역에 머물지 않았다. 곧 유럽 전체가 주목하게 될 결혼의 시작이었고, 한 소녀의 삶이 왕조의 질서 속으로 편입되는 출발점이었다.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글: 한윤경 미술특별위원

한윤경 미술특별위원
한윤경 미술특별위원은 한양대학교 응용미술학과 수료 후 빈 응용미술대학에서 디플롬(Diplom)을 취득하고 박사 과정을 수료했으며, ECM 전시 이론·기획 석사(MAS)를 취득했다.
오스트리아 국가공인 가이드로 활동하며 빈 미술사박물관(KHM) 산하 세계박물관(Weltmuseum Wien) 객원 큐레이터로 《Chaekgeori – Our Shelves, Our Selves》를 기획했고, 국제 전시 《KOREA, RE_FOUND》를 통해 한국 문화유산의 동시대적 해석과 글로벌 확장을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