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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10월 16일, 금요일

[문화칼럼] 유럽을 바꾼 세기의 로맨스: 미남 왕 필립 X 광녀 후아나의 러브 스토리 #3 – 한윤경 미술특별위원

#3. 사랑 그 후

정략결혼의 틀을 깨고 운명처럼 사랑에 빠진 두 사람. 그러나 자유분방한 부르고뉴 출신의 필립은 엄격한 가톨릭 교육을 받은 후아나와 점차 어긋나기 시작했고, 결국 그녀를 남겨둔 채 그의 영지로 돌아가 버린다. 필립의 사랑이 인생의 전부였던 후아나는 이 사실에 충격을 받아 그를 포기하지 못하고 점점 집착하게 된다.

떠난 필립도 마음은 편치 않았을 터, 그는 만삭이던 그녀를 플랑드르 궁전으로 불러들인다. 그리운 남편을 만나기 위해 당장 먼 길 떠날 채비를 하는 후아나. 하지만 때는 눈보라치는 한겨울이었고, 해산을 앞둔 몸으로 위험천만한 여정에 나서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어머니 이사벨라 여왕은 도저히 딸을 보낼 수 없었다. 그러나 후아나의 사랑은 이미 한계를 넘어서 있었고, 딸의 어처구니없는 결정을 막지 못한 여왕은 어쩔 수 없이 그녀를 궁에 가두게 된다. 콜럼버스의 후원자로서 대항해 시대의 서막을 열고, 통합된 스페인의 세계적 확장을 가능케 한 위대한 여왕조차, 사랑에 눈먼 딸 앞에서 한없이 마음이 무너지는 어머니였던 것이다.

이 무렵부터 후아나는 점점 현실과 멀어지기 시작한다. 외할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정신적 불안정성과 극단적인 감정이 얽히며 그녀는 깊은 심연 속으로 빠져들었다. 설상가상으로 이사벨라 여왕이 느닷없이 세상을 떠나는 일이 발생한다. 장남 후안에 이어 장녀 이사벨까지 연이어 자식들을 잃게 된 슬픔을 이기지 못한 것이다.

형제들의 죽음으로 뜻하지 않게 왕위 계승 서열 1위로 올라선 후아나가 카스티야의 여왕 자리에 등극한다. 이에 아버지 페르디난드와 남편 필립이 왕위 계승권을 두고 충돌했고, 욕심이 과해진 필립은 여왕이 된 후아나의 통치권을 차지하기 위해 다시 그녀 곁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 재회는 두 사람 모두에게 비극의 서막이었다. 의회의 지지를 등에 업고 후아나의 통치권을 넘겨받아 뛸 듯이 기뻐했던 필립의 시대는 오래가지 못했다. 물을 마시고 돌연 생사의 길을 오가더니 며칠 만에 유명을 달리한 것이다. 즉위한 지 불과 두 달만의 일이었다.

젊고 건강했던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둘러싼 수많은 의혹이 제기되었고. 후아나의 아버지 페르디난드 2세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스페인 전역에 퍼지기 시작했다.

후아나는 필립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차갑게 식어버린 시신을 품에 끌어안고, 그의 몸이 여전히 따뜻하다며 곧 깨어날 것이라 굳게 믿었다. 이내 그녀는 모든 장례 절차를 거부하고 최고급 향유로 그의 시신을 정성스레 보존한 후, 그의 관을 수레에 싣고 어머니의 무덤이 있는 곳으로 떠난다. 검은 상복을 입고 무려 6개월간 600km의 광야를 떠돌며 주술사들을 대동해 그의 부활을 빌며 매일 주문을 외고, 밤이면 관을 열어 필립에게 말을 걸었다. 급기야 그녀는 죽은 그의 얼굴에 입을 맞추는 기행까지 감행해 광녀 후아나(Juana la Loca)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프란시스코 프라디야 오르티즈, 『광녀 후아나』
(1887년, 프라도 미술관 소장) 자료 출처 : Wikimedia Commons

스페인 역사화가 프란시스코 프라디야 오르티즈(Francisco Pradilla Ortiz)가 1887년에 그린 “광녀 후아나”(Doña Juana la Loca)는 비극적인 사랑 속에서 광기의 절정에 이른 여왕 후아나를 처절하게 묘사한 작품이다.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필립의 관에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문장인 쌍두 독수리가 새겨져 있다. 그 아래에는 그가 물려받을 왕국들의 문장이 수놓여 있다. 살아서는 제국의 중심이었으나, 죽어서는 후아나의 광기 어린 사랑만 남은 것이다. 이 작품에서 특히 주목할 점은 후아나를 둘러싼 주변 인물들의 표정이다. 후아나를 호위하는 신하들과 수행원들은 황당하고 절망적인 얼굴로 이 상황을 바라보고 있다. 그들은 스페인의 여왕을 떠받들어야 했기에 어쩔 수 없이 이 기괴한 행렬을 함께해야 했지만, 지치고 피곤에 찬 그들의 눈빛은 이미 현실을 직시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사랑을 놓지 못한 한 여인의 심리적 붕괴를 생생하게 표현한 이 작품은 순수했던 사랑이 첨예한 권력 다툼의 틈바구니에서 어떻게 변질되어 가는지 극명하게 보여준다.

후아나의 아버지 페르디난드 2세는 사위 필립이 죽자 섭정으로 나서며 사실상 스페인을 거머쥔다. 그는 통치를 더욱 확고히 하기 위해 1507년 그녀와 그녀의 막내딸 카탈리나를 수도원인 토르데시야스 성에 가두어 버린다.

이사벨 여왕 사후 어린 계비까지 맞아가며 자식을 낳아 통치를 이어가려 했던 페르디난드 2세는 결국 다른 후사를 보지 못하고 후아나의 아들인 칼 5세를 후계자로 삼는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 막시밀리안 1세의 보호 아래 자란 칼 5세는 1516년 63세를 일기로 사망한 페르디난드 2세의 뒤를 이어 16세에 스페인 국왕으로 즉위한다. 그는 왕위 계승을 위해 감금된 어머니 후아나를 찾는다. 실권은 없으나 공식적으로 카스티야와 레온, 아라곤의 여왕의 직함을 가진 후아나와 공동 통치의 형태를 취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아들을 알아보지 못했고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절망한 아들 칼 5세는 다시는 어머니를 찾지 않았고, 75세로 후아나가 죽을 때까지 유폐를 풀지 않았다.

프란시스코 프라디야 오르티즈, 『토르데시야스에 갇힌 광녀 후아나』
(1906년, 프라도 미술관 소장. 현재 사라고사 박물관 전시) 자료 출처 : Wikimedia Commons

프란시스코 프라디야 오르티즈의 또다른 그림, “토르데시야스에 갇힌 광녀 후아나”(La reina doña Juana la Loca, reclida en Tordesillas con su hija, la infanta doña Catalina)를 보자. 어린 카탈리나가 무릎에 매달려 있지만 후아나의 표정은 삶을 놓아버린 사람의 그것처럼 그저 공허하기만 하다. 칼 5세가 이런 그녀에게서 어머니를 느낄 수 없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리라.

페터 파울 루벤스, 『유피테르, 메르쿠리우스, 필레몬, 바우키스가 있는 뇌우 풍경』
(1620년경, 빈 미술사 박물관 소장)

남편의 죽음으로 엄청난 재앙을 마주하게 된 후아나! 사랑을 잃고 그녀의 세상은 무너져 내렸다. 그것은 마른 하늘의 날벼락과도 같은 충격이었고,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온 세상이 천둥과 폭우로 뒤덮이는 것 같은 공포였다. 천재지변과도 같은 운명에 휩쓸려 비운의 삶을 살았던 후아나의 짧았던 사랑과 그 후에 따라온 긴 고독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비뚤어진 집착이 한 사람의 인생뿐 아니라 역사까지 뒤바꿀 수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잔혹한 증거다. 한편 지독한 뇌우를 뚫고 살아남은 노부부의 모습을 담은 루벤스의 그림은 남편과의 해로를 그토록 염원했던 후아나의 마음을 보듬어 주기 위함이 아닐까?

그림 속 주인공들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우리와 깊이 소통한다. 잉글랜드의 소네트 시인, 리처드 반필드(Richard Barnfield)는 일찍이 “사랑은 악마이며 불이며 천국이며 지옥이다. 쾌락과 고통, 슬픔과 후회가 거기에 함께 살고 있다.”라고 한 바 있다.

빈 미술사 박물관에 나란히 걸린 아래의 그림 세 점은 사랑으로 인해 일평생을 천국과 지옥, 쾌락과 고통, 슬픔과 후회 속에 살아간 가엾은 후아나의 이야기를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우리에게 끊임없이 들려주고 있다.

글: 한윤경 미술특별위원 / 사진: 위키피디아, 빈 미술사 박물관


한윤경 미술특별위원 약력 (Mag.art. HAN Yun-Kyoung)

  • 한양대학교 응용미술학과 학사과정 수료
  • 빈 응용 예술대학교(Universität für Angewandte Kunst) 산업 디자인, 금속 공예과 석사, 박사과정 수료
  • ECM 전시 이론 및 기획 석사 (2010)
  • 오스트리아 국가공인 가이드 자격증 (2005)
  • 필리핀 한국 문화원 큐레이터 (2016-2017)
  • 서울, 독일, 홍콩 갤러리 다수 전시 기획
  • 빈 미술사 박물관 벨트 뮤지엄 한국 민화 책거리 전시 “Chaekgeori-Our Shelves, Our Selves” 기획
  • 서울 청담동 바카라 메종 전시 기획 (2023-2024)
  • 문화유산회복재단 아트 디렉터
  • 독일, 체코, 폴란드 “KOREA, RE_FOUND” 전시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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