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첫눈에 반해 버린 사랑
정략적 이해 관계 속에서 정해진 왕가의 결혼이었지만, 1496년 네덜란드의 릴(Lille)에서 드디어 만난 두 사람은 그만 첫눈에 반해버렸다. 필립은 후아나의 이국적인 아름다움에 눈을 떼지 못 했고, 후아나는 필립의 빼어난 외모와 당당한 태도에 마음을 빼앗겼다. 얼마나 불타올랐으면 만난 당일에 결혼을 해 버렸을까? 그들의 사랑은 첫만남부터 열정으로 물들었고, 달콤한 신혼의 시간은 마치 끝나지 않을 꿈처럼 행복했다.
빈 미술사 박물관에는 이와 관련된 바로크 미술의 거장, 루벤스의 그림 두 점이 있다. 먼저 “미남왕 필립의 초상화”부터 살펴보자.

이 초상화는 정통성 강조를 위해 정치적인 목적으로 그려진 그림이다. 루벤스가 필립을 직접 만나 그린 것이 아니라 필립의 다양한 초상화를 참고하여 재구성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미남왕 필립의 갑옷에는 다양한 가문의 문장과 화려한 장식, 그리고 왕관이 등장하는데, 이 그림을 통해 합스부르크 가문의 위대함과 그들이 얼마나 대단한 제국의 통치자였는지 보여주려 한 것이다. 필립의 아버지는 합스부르크 제국과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였고, 어머니는 부르고뉴의 유일 상속녀였다. 또한 필립의 장인은 아라곤의 왕, 장모는 스페인을 통일한 카스티야의 여왕 이사벨라로서 필립과 결혼한 후아나는 훗날 유럽을 넘어 스페인의 식민지까지 통치할 수 있는 막강한 통치권을 물려받게 된다. 그러니 그들의 첫 아들인 스페인의 국왕, 칼 1세의 권력은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다음은 필립의 초상화 옆에 전시된 “시몬과 에피게니아”를 보자. 보카치오의 소설 <데카메론>에 등장하는 첫눈에 반한 두 남녀의 사랑 이야기다. 이 두 점의 그림이 함께 나란히 걸려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첫눈에 반한 운명적인 만남’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필립과 후아나가 보자마자 열렬한 사랑에 빠진 것처럼 시몬과 에피게니아도 만나자마자 뜨거운 사랑에 탐닉했다는 이야기가 서로 연결되는 것이다.
그림은 길을 가던 남자가 우연히 잠들어 있는 여인을 마주한 찰나의 순간을 포착하고 있다. 집안의 문제아로 무시 받던 방탕 귀족 시몬은 시골로 쫓겨나 제멋대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길을 가다 여신처럼 아름다운 에피게니아를 보고 첫눈에 반하게 되었고, 이 운명적인 만남을 통해 개과천선하여 그녀와 사랑을 이루어냈다는 이야기가 그림 속에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그림 아래쪽의 원숭이는 예의 범절과 기초적인 학문을 모르는 시몬의 과거를 비유하며, 먹고 있는 귀하고 흔치 않은 과일들은 시몬의 귀족 신분을 상징한다.
빈 미술사 박물관은 이 두 작품을 나란히 놓음으로써 필립과 후아나의 아름다운 러브 스토리를 은근히 상기시킨다. 결혼으로 완성시킨 합스부르크 가문의 대단한 권력을 정치적으로만 보지 말고, 신적인 존재로 여겨졌으나 그들도 평범한 인간과 다름없는 희로애락 속에 있었다는 것을 느껴보라는 것이리라! 이렇듯 그림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과 수백 년 전 이야기 속의 인물들을 연결시킨다. 현대인들이 미술관에서 많은 위안과 영감을 얻는 것이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글: 한윤경 미술특별위원 / 사진: 빈 미술사 박물관
한윤경 미술특별위원 약력 (Mag. HAN Yun-Kyoung)

- 한양대학교 응용미술학과 학사과정 수료
- 빈 응용 예술대학교(Universität für Angewandte Kunst) 산업 디자인, 금속 공예과 석사, 박사과정 수료
- ECM 전시 이론 및 기획 석사 (2010)
- 오스트리아 국가공인 가이드 자격증 (2005)
- 필리핀 한국 문화원 큐레이터 (2016-2017)
- 서울, 독일, 홍콩 갤러리 다수 전시 기획
- 빈 미술사 박물관 벨트 뮤지엄 한국 민화 책거리 전시 “Chaekgeori-Our Shelves, Our Selves” 기획
- 서울 청담동 바카라 메종 전시 기획 (2023-2024)
- 문화유산회복재단 아트 디렉터
- 독일, 체코, 폴란드 “KOREA, RE_FOUND” 전시 기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