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한국’은 본지에 소개된 바 있는 오스트리아 한인문우회 회원들의 작품들을 문화 면에 지속적으로 싣고자 합니다. 게재되는 작품들은 한인문우회 문집 <도나우 담소> 제6호에 있습니다.
<오스트리아 한인문우회 작품소개>
환상적인 남편
– 홍진순 –
코끝을 간질이는 짙은 커피 향과 오믈렛 냄새. 이내 살포시 뺨에 와 닿는 부드러운 입술이 나를 깨운다. 아직 잠에 취해 반쯤 열린 눈앞에는 알맞은 갈색으로 구워진 토스트와 멜랑쉬 (커피에 생크림을 얹은 오스트리아의 전형적인 커피)까지 보인다. 버섯과 양파가 잔뜩 든 오믈렛, 그리고 갸름하게 썰어진 연한 오이와 방울토마토까지…. 어떻게 나의 입맛에 꼭 들어맞게 잘도 차려졌을까! 눈을 번쩍 뜨면 이 황홀한 아침이 금방 사라질까 두려워 침대에서 그냥 뭉그적거리고 있다. 리처드(내가 좋아하는 할리우드 배우 Richard Gere)는 안다. 어떻게 나를 침대 밖으로 끌어낼 수 있는가를. 양손에 두 잔의 황금빛 샴페인을 들고 그 심장을 녹이는 웃음, 웃을 듯 말 듯 해서 더 애타게 만드는 그 마력의 미소를 지으며 내게로 오고 있다. 순간 방문 앞에 다급하게 오가는 불안한 그림자도 본 것 같지만, 샴페인으로 입술을 적시고 리처드와의 달콤한 입맞춤을 하기 전에는 결코 아침상에 가 앉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음울한 그림자는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온다. 리처드는 어느새 사라져버렸고 다급하고 짜증 섞인 얼굴이 나를 째려보는 듯하다. 나는 더 눈을 굳게 감아 버린다.
“커피는 어딨어?”
“여기 내 앞에~~”
리처드의 커피향에 취한 채 웅얼거린다.
“아직도 잠이 덜 깼어? 지금이 몇 시인데! 출근 시간도 빠듯하고 커피통은 비어 있잖아! 난 지금 샤워도 해야 되고 수염도 다듬어야 되고…, 무지 바빠. 커피 좀 찾아서 내려주고 자동차 키도 좀 찾아줘!”
와장창! 한 옥타브가 더 올라간 새된 목소리에 내 황홀한 순간이 화들짝 놀라서 성급히 창을 넘는다.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린 창문으로부터 현실의 냉기가 쏟아져 들어오고 나는 오소소 몸을 떤다.
‘물건은 항상 제 자리에. 그러면 찾지 않아도 되고 시간을 낭비하지도 않을 텐데….’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배워 온 문장이 아닌가! 굳은 얼굴의 한 남자가 수건을 두툼한 배에 두른 채 허둥대고 있는 앞에서 난 또 그 명교훈을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한다.
새벽 5시, 이 시간이면 벌써 자동차 안에 앉아 있어야 한다. 그런데 어제 저녁에 해 놓았어야 할 출근 준비를 그만 깜빡했댄다. 날마다 무언가를 잊어 버리고, 잊어 버린 것을 잊어 버리고, 날마다 무언가를 찾다가 시간을 잃어 버리고, 기다려 주지 않는 시간에 목이 조이는, 시간의 굴레를 시시푸스(Sisyphus)의 바위처럼 짊어진 운명의 남자! 그 운명의 굴레에 나도 한 발이 낀 채 힘겹게 돌아간다. 어쩌다 한 번 찾아온 달콤한 꿈마저도 시간의 굴레로 박살 내버리는 제우스 같은 위력! 또한 그는 가지고 있다.
그 폭풍이 지나간 자리로 등뼈 없는 물고기처럼 흐느적거리며 들어가 본다. 상상한 현실의 한 장면이 펼쳐져 있다. 예상대로 욕실 바닥엔 홍수가 나 있고 물 위에는 면도 거품, 목이 떨어진 치약 뚜껑, 실내화가 떠 있다. 오랫동안 잊었던 풍경을 다시 맞이 하곤, ‘생의 마지막 날도 자신을 찾느라고 저승사자마저 기다리게 할 위인’이라고 한 시할머니의 예지에 공감하며, ‘오늘은 정말 바빴나 보다’라고 큰 숨 한번 내쉬고 웃어 본다.
처음엔 마냥 그랬었다. 생각 없이 들어갔다가 항상 양말이 푹 젖어 버려서 분통이 터졌던 많은 날들. “우리 할머니도 늘 그러셨어. 내가 샤워한 뒤엔 하마가 헤엄치고 갔다고…” 겸연쩍은 듯 우물거렸다. 그 하마를 길들이는 데 쏟아부은 나의 잔소리가 효력을 발휘하기까지 숱한 시간이 걸렸다. 할머니의 하마는 이제 조용한 물살을 일으키는 수달이 되었지만, 아직도 가끔은 하마의 본성이 튀어 나온다. 오늘 같은 날…. 양말과 팬티는 아직도 바닥에 고대로 돌돌돌 똬리를 틀고 있다. 세탁실과의 거리가 1미터도 안 되지만 그의 눈과 마음에선 멀기만 한가 보다. 그것만은 질끈 눈감아 주기로 한다. 사람 고쳐 쓰는 거 아니라고, 그게 되면 어디 내 남편이겠나!
환상마저도 몰아내는, 너무도 환상적인 내 남편!
작가 소개 – 홍진순

지은이 홍진순은 한인문우회 회원이자, <한겨레문학상> 수필 부문 신인상을 수상한 등단 작가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