린츠 주립극장에서 크게 부상하는 가진이 지휘자
노벨문학상 수상작 오페라 ‘일 비아지오’ 지휘로

오스트리아 린츠주립음악극장에서 지난 10월 19일 초연된 현대 오페라 신작 ‘일 비아지오’(IL VIAGGIO: die Reise – 여정)는 크게 세 가지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요즘 한강 작가가 영예의 노벨 문학상을 수상함으로써 한국인의 자긍심과 기쁨이 하늘로 솟고 있는데, 오페라 ‘일 비아지오’도 이탈리아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루이지 피란데로(Luigi Pirandello)의 두 중편 소설을 대본으로 삼은 것이다. 피란데로의 250여 편의 중편 소설 중 서로 비슷한 내용을 가진 ‘다른 집으로부터의 빛’(Das Licht vom Anderen Haus)과 사람의 삶을 여행으로 다룬 ‘여정’(旅程)을 오페라로 만든 것이다.
두 단편을 읽자마자 악상이 떠올라 짧은 시간에 작품을 완성했다는 대본 작가이기도 한 독일 다름슈타트 출생의 작곡가 알로이스 브뢰더(Alois Broeder:1961-)와의 만남이다. 그는 오늘날까지 약 110여 개의 오케스트라, 실내악, 성악곡, 작품을 남겼지만, 주된 것이 전자 음악이었으므로 현대 청중들에게는 그의 진가가 늦게 알려졌다. 특별히 오페라계에서는 코로나 팬데믹 이후 새로운 오페라를 찾는 가운데서 브뢰더를 발견한다, 2013년 초연 첫 오페라 ‘죽은 자들의 아내들’(Die Frauen der Toten:Nathaniel Hawthorne의 동명 소설 대본)과 2014년 초연 3부작 오페라 ‘기대하지 않은 재회’(Unexpected Reuion:Johann Peter Hebel의 달력 이야기 대본)가 독일 오페라계에서 큰 관심사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이다.


린츠주립음악극장 가진이 부지휘자의 지휘 경력은 짧은 것이 아니다. 건국대에서 피아노를 전공하고 드레스덴의 카를 마리아 폰 베버 음대에서 피아노 반주학 전공을 더한 그녀는 2006년 브레멘 극장에 반주자로 들어간다. 국가 지휘 콘서트 고시 등에 합격하여 어린이 합창단 지휘, 극장 합창단 지휘, 합창 총감독을 거쳐 2011년 상임 지휘자 마르쿠스 포쉬너(Markus Poschner)의 부지휘자로 승격한다. 그리고 2017년 포슈너가 린츠주립극장 음악총감독 겸 안톤 브루크너 오케스트라 상임지휘자로 자리를 옮기게 되자 그녀도 부지휘자로 함께 자리를 옮겼다.
부지휘자 가진이는 주로 린츠주립음악극장의 오케스트라의 리허설과 관련 업무를 총괄하면서, 제2의 오페라 공연장이라고 할 수 있는 소속 ‘뮤직 박스’(Music box)공연의 지휘를 밭아 왔다. 작년에 와서 작크 오펜바흐(Jacques Offenbach)의 ‘페피토'(Pepito)와 페터 안드로쉬(Peter Androsch)의 ‘학교'(The School)의 음악 감독을 맡으면서 이번에 역사적인 알로이스 브뢰더의 두 작품 공연에 음악 감독을 맡게 된 것이다. 어떤 의미로는 지휘자 가진이에게는 이번의 등장이 마르쿠스 포쉬너의 부지휘자로 본격적인 지휘계에 투신한 지 13년 만에 유럽에 한인 여성 지휘자로서 그 이름을 크게 알리게 되는 계기를 가지게 된 것이다.
아직 아무 데에도 잘 알려지지 않은 오페라 일 비아지오는 유럽의 재앙적인 상황의 시작이라는 1930년대에 이탈리아의 시칠리아라는 변두리에서 만들어진 이야기다. 사랑은 어디로 갔는지, 증오가 팽배해진 시대다. 그리움은 잊혀지고, 무관심은 외투처럼 걸쳐지고, 전염병 같은 나태함이 만연해 있을 때다. 마음 깊이 울려 나오는 느낌은 크고, 내부와 외부에서 달려들 듯한 악마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사람들의 내부가 벽들로 막혀져 있을 때이다.

오페라 일 바지오의 첫째 편 ‘다른 방으로 부터의 빛’은 어렸을 때 아버지로부터 받은 충격적이고 폭력적인 추억의 트라우마를 앓고 있는 청년 툴리오 부티(Tullio Buti:Christopher Gerhardus)를 조명한다. 그는 성격이 괴팍하고, 악명이 높을 정도의 외톨이이다. 그는 크로틸디나 니니(Clotildina Nini:Saskia Maas))여인이 경영하는 여인숙에 방을 얻어 들어간다. 방은 전등이 없고 어두움에 항상 쌓여있다. 툴리오 부티가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폭력의 트라우마는 시대적인 폭력이고, 어둠도 시대적인 어둠임을 상징한다.
툴리오 부티의 방은 길 건너편 집 창문에서 들어오는 빛으로 밝아진다. 그는 빛을 통하여 반대편 아파트에서 부부와 아이들이 단란한 가장을 이루고 살고 있는 목가적인 모습을 관찰할 수 있게 된다. 가족의 친밀한 모습은 그에게 삶의 비약이 있게 한다.
어느 날 저녁 여인숙 주인 클로틸디나 니나는 툴리오가 이웃 가족을 지켜보고 있는 것을 보고 그가 이웃집 부인 마르게리타 마시(Margerita Masci:Genesis Beatriz Lopez De Silva)와 사랑에 빠진 것이 틀림없다고 결론을 내린다. 니니와 그녀의 딸은 마르게리타 마시 부인을 방문, 그들을 지켜보고 있는 부티를 고자질한다.
툴리오는 이제 마르게리타 가족이 자신에 대해 알게 되었기 때문에 앞으로 더 이상 가족을 볼 수 없을까 봐 두려워한다. 하지만 마르게리타는 커튼을 닫는 대신 창가로 자주 다가온다. 집들 사이의 어둠 속에서 그들은 몇 마디 말만으로 함께 사랑을 나누기도 한다. 툴리오는 어두운 방을 떠난다. 마르게리타는 가족을 떠나 툴리오와 함께 살게 된다.

얼마 후 툴리오와 마르게리타는 어둠 속에서 마르게리타 아이들의 삶을 관찰할 수 있도록 니니 여인숙의 방을 다시 임대한다. 이제 두 사람은 이상해진 아파트의 불빛을 통해 관중으로서 몰래 사건의 흐름을 지켜본다. 사랑은 마르게리타에게 새로운 행복함을 주는 대신, 가족을 버리고 나온 그녀에게는 어둠에서 다시 그들을 보아야 하는 역설이 따른다.
오페라 일 비아지오 둘째 편 ‘여정’(旅程)은 짧고 불행한 결혼 생활 후 남편을 사별하고 13년 동안 고독을 안고 살아온 아드리아나 브라기(Adriana Braggi:Saskia Maas)를 조명한다. 그녀는 시칠리아섬에서 두 아이와 시동생 체차레 브라기(Cesare Braggi:Martin Enger Holm)와 함께 살고 있다.
형수를 오랫동안 사랑해 온 체차레는 둘이서 함께 여행을 떠나 마음껏 사랑을 해보길 권한다. 그러나 아드리아나는 그녀가 오랫동안 병으로 고통을 안고 살고 있다고 말한다. 체차레는 의사를 급히 불렀으나 의사는 아드리아나가 암을 앓고 있다고 진단한다. 체차레는 다른 의사에게 두 번 째 진단을 받아 보자며 여행을 떠날 것을 재차 권한다.
아드리아나는 생애 처음으로 집을 나와 시칠리아를 떠났다. 그녀는 채차레와 함께 팔레르모를 거쳐 나폴리로 왔다. 좋은 의사도 불러 진단을 확인하고, 통증을 치료하기 위해 약을 복용하기 시작했다. 그녀와 체차레는 점차 더 가까워졌다. 그러나 아드리아나는 시부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인정하면서,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두 사람은 집으로 돌아가는 대신 더 멀리 여행을 하자며 베니스에 도착한다. 아드리아나는 남편 사후 함께 죽어버린 자신의 삶이 다시 살아난 것을 깨닫게 된다. 그녀는 체차레와의 새로운 삶을 꿈꾸기도 한다.
아드리아나는 체차레가 편지를 부치기 위해 혼자 우편국으로 갔을 때 아들들이 보내온 우편물을 발견한다. 그녀는 배니스에서 자신의 여행이 끝나게 되며, 다시는 시칠리아를 볼 수 없는 육체의 한계를 느낀다. 처방받은 약을 마시고 그녀는 목숨을 끊는다.
‘두 폭 개념’의 이 오페라는 인간 조건의 경계선 상황을 다룬 것이다. 억압적인 과거와 상황으로 마비되고 무생명적으로 된 상황에서 사랑이라는 유일한 무기에 의존하여 벗어나려고 노력했지만, 함께 찾아온 고통과 비극은 어쩔 수 없었다. 마르게리타와 아드리아나 두 주인공 모두 부부와 가족을 희생하고 나섰지만, 인간의 궁극적인 비극으로 끝을 맺는다. 인간이 더 진화해야 하는가? 신앙이 더 필요해지는 것인가?
소년 기타리스트에서 시작하여 고전, 낭만, 현대 전자 음악까지를 마스터 한 작곡가 알로이스 브뢰더의 음악은 신선했다. 낯설지 않은 음향들이었지만, 이전에 몰랐던 향기 같은 것을 느끼게 하는, 언어와 음악이 일치하는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전반적으로 빛의 음색과 어둠의 음색이 교차하면서, 서로 크게 충돌하는 괴음까지를 발하였지만, 결국은 밝음과 희락의 미래를 약속할 수밖에 없는 평화의 음색으로 끝을 이끌었다.
가진이 지휘자의 바톤은 이를 훌륭하게 표상하면서 오케스트라의 협연과 오페라의 흐름을 전반적으로 잘 조정했다. ‘다른 집으로부터의 빛’에서 비명을 지르는 듯한 끝마무리와 길고 조용하게, 아주 조용하게 소멸되어 가는 ‘여정’의 끝마무리는 인상에 깊이 남는다.
매우 치밀하면서도 다양한 용도로 활용할 수 있는 미니말리즘 적인 무대에 설치된 기차, 마차, 증기차, 곤돌라의 소리를 배경 뒤의 오케스트라석에서 이들과 함께 진행하는 듯한 여행의 소리를 만들어 낸 오케스트라의 소리는 탁월했다.
특별히 아드리아나가 긴 여행을 통해 체차레와의 사랑에 새롭게 눈을 뜨고 황홀감에 잠기는 모습을 찬송가로 들려준 솜씨는 청중들의 억압된 가슴들도 모두 해방시켜 주는 듯했다. 지휘자는 모두의 운명의 여정에 승리를 심어 주는 듯했다.
이날 출연자들 중 툴리오 투티역의 테너 크리스토프 게르하르두스, 마르게리타 마시역의 소프라노 제네시스 베아트리즈 로페즈 데 실바, 아드리아나 브라기 역의 소프라노 사스키아 마아스, 체차레 브라기 역의 테너 마르틴 엥게르 호름의 노래와 연기가 좋았다. 그레고르 호레스(Gregor Horres)의 연출도 우수했다.
글: 김운하 발행인 / 사진: 린츠주립음악극장
*이 글은 월간 객석 2024년 12월호에 게재된 내용을 전재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