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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10월 15일, 목요일

2. 윤이상 선생과 15년, 그리고 그 후

윤이상 선생님과의 다채로운 음악 인연

 

1984년 4월 독일 프랑크푸르트 독창회와 베를린 독창회에 이어 1984년 7월 민족시보사 주최로 도쿄 신주큐큐 서쪽 입구의 안전 생명 홀에서 가진 김운하 도쿄 독창회 프로그램 표지

시작하는 말에서 흥미진진하기도 한 대붕 윤이상 선생과 나와의 음악 인연을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 글이 대붕과의 음악 이야기가 주를 이루겠기 때문이기도 하여 운을 좀 띄우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야기를 더 전개하기 전에 세 가지를 먼저 말하고 싶다. 하나는 나의 가계(家系)가 음악과 민족사, 정치와 예사롭지 않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중학생 시절부터 나중에 대붕의 제자가 된 최인찬 자곡가와의 만남, 셋째는 고교시절 음악수련을 중심으로 한 청운회 창립 운영이다.

나중에 자세히 말할 기회가 있겠지만, 나의 가계는 한국 음악사와 독립운동사에 한 페이지를 남길 수 있는 발 자취를 남기고 있다. 한덕세(韓德世) 나의 조모는 이화학당 음대 성악과 1회 졸업생이다. 도산 안창호 선생이 창립한 대한여자애국단 사무장을 지낸 조모는 재미동포 최초의 한인 피아노 교습소 설립자이며 기미년 3.1독립운동 기념식과 개천절 같은 동포행사 때 마다 독창으로 참여한 애국 성악가 였다. (미주 독립운동지 신한민보 보도 참조)

나의 큰 고모 매리(Mary:한국 명 영애)님과 작은 루즈(Ruth:한국 명 영옥)는 1920년 미국 매리랜드 주 벌티모어의 명문 음악대학 ‘피바디 컨서바토리’(Peabody Conservatory)한국인 최초의 입학생 들이다. 1921년 작곡가 홍난파 선생이 동아일보 특파원으로 미국을 순회하면서 고모 형제들을 취재 보도한 기사가 동아일보에 남아 있다. 영옥 고모의 외동녀 데이지에타 김은 로스 앤젤레스 남가주대학교 음대(학사와 석사)와 파리 소르본느 음대(최고 연주자 과정)를 마치고 미국에서 성악가로 활동 했다.

당시 워싱턴 디씨에서 구미위원부 위원장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이승만 박사가 윤치영(전 내무장관)동지 등을 대동하고 피바디 컨서바토리를 방문, 고모들을 축하하고, 워싱턴으로 초대하여 만찬회를 베푼 일이 ‘우남 이승만 일기’에 나온 다. 이승만 박사가 나중에 큰 고모 매리에게 청혼을 했던 사실도 출판되었다.(Marn J. Cha:Koreans in Central California(1903-1957).

김유진(金有振)나의 선친은 마산 창신학교, 서울 배재 고보에서 서양가곡을 배운 후 아마츄어 아코디온 가수 였다. 민주일보 마산 지국장과 국민방위군 건설처장 등을 지낸 선친께서는 가족들의 잔치나 파티에서 아코디온을 반주 삼아 노래를 잘 부르셨던 것이 추억으로 생생하게 살아 있다. 황갑주(黃甲周-영숙)나의 어머니 마산 의신 여학교 오월의 여왕 출신으로 역시 명창이셨다. 최초의 마산 야학교를 세웠던 어머니는 7개 중고등학교 재단 함안 명덕육영회와 부산 해양고등학교 재단 신민학원의 이사장으로 세상을 떠나시기 전 까지도 부산진 제일 장로교회 수석 권사로 명창이셨다.

나는 마산 완월 초등학교 최초의 학생위원장으로 학교 총 학예회의 인기있는 명창이기도 했다. 조부 형제들과 선친께서 다니신 마산 창신 중학교에 입학, 1학년 때부터 학급 반장을 지냈다. 3학년 때 청년 성악가 겸 합창 지도자 최인찬 선생이 음악 교사로 부임하여 나의 노래를 듣고 나를 내세우기 시작했다. 최 선생은 당시 창신중학교와 고등학교의 합동 아침 조례(朝禮)에서 애국가 봉창을 선창하고 지휘하던 일을 나에게 마꼈다. 그 일을 고등 학생들을 제외하고 매우 이례적으로 중 3인 나에게 시켰다. 나는 매일 아침 조례대에 올라 서서 애국가를 선창하고 지휘 했다. 이 경험으로 마산 문창교회 학생성가대를 비롯하여 성인 성가대 지휘자의 경력을 미국 생활 초기 까지 가지게 되었다.

최인찬 선생은 나의 아내 김충자(金充子)의 마산 YMCA(당시 총무 남행수 선생)어린이 합창단 지휘자였다. 아내는 솔로이스트로 방송국 공연에 자주 나가기도 하여 우리 부부는 최 선생과 오랜 인연을 가진 부부인 셈이다.

​최 선생은 윤이상 대붕 선생의 초청으로 서울대의 백병동, 강석희 교수등과 함께 독일로 유학을 가서 대붕의 제자로 작곡을 공부 했다. 최 선생은 부산 동아대학 교수로 재직 할 때 미국 로스 앤젤레스로 나를 방문한 적이 있다. 한국 민주화 운동의 지도자이며 마산 동향인인 박형규 목사의 매제인 그는 당시 신한민보사 발행인 겸 사장으로 있는 나를 찾아와 박형규 목사의 부목사로 옥중에 있던 이해학 목사의 옥중 선언서 등, 민주화운동 자료들을 전해 주고 갔다. 나는 이 자료들을 신한민보에 모두 보도했다. 당시 최인찬 선생은 보스턴 탱글우드 여름 음악 페스티벌이 공모한 작곡현상모집에 1등으로 당선되어 수상식에 참석차, 도미하는 길에 박형규 목사의 부탁으로 로스 앤젤레스에 먼저 도착하여 나에게 자료들을 전한 것이다. 은사님을 수십 년 만에 만나 뵌 당시의 추억이 오늘에도 감동적으로 느껴진다.

나는 1953년 마산고등학교 제 15기 생으로 입학했다. 학교 성적도 좋았지만, 성악으로도 유명했다. 교내 성악 콩쿠르에서 항상 입상하여 진주 영남예술제에 2년 간 출전했다. 그러면서 1학년 여름 방학 전에 전 마산 고교학생들을 망라한 마산고등학생 웅변회를 조직하고, 마산고교에는 나라를 위한 큰 인물들이 되자는 청운회(靑雲會)를 조직했다. 나는 창립자 겸 초대 회장으로서 당시 희랍 철학자 플라톤의 국가론에 큰 영향을 받아 국가의 지도자로 성장하려면, 시와 음악 교육을 먼저 중시하는 수련을 해야 함을 강조 했다. 문학과 음악 교육, 행사를 많이 가졌다.

이 청운회는 15기, 16기, 17기 등 학년을 거듭하면서 한 학년 마다 회원들을 선발 했다. 나의 박정희 대통령 정부 유신반대로 나의 상황이 어려워 지면서 내가 미주특파원으로 쫓겨 나오자, 청운회 확장 운동은 중지되고, 그 활동은 음악 운동으로만 국한되어 갔다. 그러나 70여 회원들 중에서는 상당한 인물들이 배출되었다. 경남 교육감에 표동종, 서울대학 환경대학원장 김형국 박사, 국회의원 박성태, 곽치영, 작곡가 이수인, 소설가 김병총과 하기주, 언론인 김형호, 건축가 김운해, 대학교수 박대운, 우봉가, 중소기업가로 홍종민, 배석채 등이 배출 되었다. 문학계에 특기할 일은 동기생 이제하가 초기 회원으로 있다가 나가서 마산 백치동인회를 창립하여 마산 문학계를 크게 세우고 한국문학사에 공헌 한 일이다. 내가 만약 미국으로 나오지 않고 한국에 있었다면 청운회의 역사는 더 크게 발전했으리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 이야기들을 나중에 상세하게 소개할 예정이다.

다시 윤이상 대붕 선생과의 인연으로 돌아 가 보자. 마산고 자주 정신 고취의 교가 외에 대붕의 작품을 처음 대한 것은 1981년 5월 21일이었다고 생각된다. 일본 도쿄 히비야 공원 음악당에서 연주된 대붕의 유명한 교향시곡 ‘광주여 영원히!’였다.

5월 18일부터 열린 김대중 선생 구출 긴급세계대회‘3일간의 행사가 끝난 후 마지막 날 주최측은 ’5.18광주민주항쟁 1주년 기념음악회‘를 히비야 공원에서 열었다. 당시 일본의 소장 현대음악 작곡가 다까하시 유우지(高橋悠治)의 지휘로 선생님의 ’광주여 영원히!‘가 연주되었다. 당시의 나의 감동은 대단한 것이었다. 용솟음치는 분노와 쏟아지는 눈물, 우리의 선한 광주양민들을 학살한 그 원수들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게 된 당시의 감동은 오래 동안 나의 전신에서 맥박 쳤다.

​도쿄에서 대붕 선생의 훌륭한 인품과 예술에 매료된 나는 로스 앤젤스로 돌아와 우연히 통영 출신 여류시인 이숭자 여사가 대붕의 제일 첫 번 가곡집 ‘달무리’를 가지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숭자 시인은 어렸을 때부터 대붕을 한 교회에 다니면서 오빠처럼 지내 온 터로 이 ‘달무리’ 작곡집을 가보처럼 간직 해 왔다는 것이다.

1949년 발행된 가곡집 ‘달무리’는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박해를 받기 시작, 박정희 정부 때도 금기가 되었다. 독재정권의 탄압을 두려워하여 아무도 부르는 사람이 없어 가치 있고 귀중한 가곡이 묻히고 잊어진 상태에 있었다. 내가 알려야 되겠다고 결심했다.

​당시 나는 시카고 노스 일리노이 대학교 성악과 졸업생(학사, 석사)으로 오페라 가수 생활과 본교 교수 생활 후 은퇴한 재너 엘드리지(Janer Eldridge)교수의 성악 제자 였다. 엘드리지 교수는 로스 앤젤리스 제 1 유리태리안 교회 음악 목사로 봉직 하면서 후진들을 양성하고 있었다. 나는 수년 간 사사한 후 선생의 추천으로 이미 2회의 독창회를 개최, 유명세를 더하고 있었다.

윤이상 가곡은 유럽이후의 것도 그렇지만, ‘달무리’가곡집에 있는 ‘고풍의상’ ‘나그네’ ‘달무리’ ‘편지’ 추천‘ 등 초기의 5곡도 부르기가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한국 국악 전통의 가곡, 가사, 판소리, 특별히 가야금 산조를 모르고서는 제대로 부르기가 힘든 곡이다. 당시 이 가곡들을 공부했거나 가르치는 사람을 발견할 수도 없었다. 녹음된 것도 없었다. 연습을 시작했으나 도무지 맛을 낼 수가 없었다. 나는 대붕의 성악 실력도 대단한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독일로 국제 전화를 넣었다. 나의 의사를 전달하고 그 공부 방법을 문의했다.

대붕은 전화 레슨을 하자고 제의 했다. 당시는 국제 전화비가 비쌌다. 대붕은 레슨 날 자신이 먼저 전화를 하셔서 나를 가르쳤다. 나는 열심히 배웠다. 나는 1982년 10월 1일의 제 1회 독창회와 1984년 1월 28일의 제 2회 독창회가 크게 성공하자 큰 소원이 생겼다. 나는 그동안 공부한 대붕의 가곡 중 세곡을 합하여 유럽에서 독창회를 가지고 싶은 생각에 열을 올렸다. 내가 그동안 열심히 공부한 곡들은 가곡집 달무리 중에서 ‘고풍의상’과 ‘달무리’ ‘나그네’였다.

나는 제 2회 독창회를 끝낸 직 후 대붕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의 제 2회 독창회의 성과를 말씀드리고 이젠는 소망의 하나인 베를린 독창회를 열어 달라고 부탁했다. 대붕은 잠시 말문이 막히는듯 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그렇게 하자고 승낙을 했다. 후에 나의 베를린 독창회가 끝난 후 열린 리셉션에서 대붕은 나로부터 독창회 후원 요청 전화를 받고 느끼셨던 충격을 이렇게 말한 것이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김운하 사장으로부터 베를린 독창회를 열어달라는 전화를 받고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베를린이 어떤 곳입니까? 천하 기라성 같은 성악가들도 감히 독창회를 가지겠다는 엄두를 내지 못하는 곳이 아닙니까? 김운하 사장은 엄격히 따지면 성악을 전공한 사람도 아니고 목소리가 좋고 열성이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은 잘 알지요. 높이 대접하자면 ‘운동권 성악가’인데 나는 앞이 캄캄해 졌습니다. 그러나 내 자신이 민족과 조국을 위하여 몸 바치고 있는 예술가로서, 김운하 사장도 민족과 조국을 위하여 자기의 예술 혼을 보태겠다는 점을 높이 사서 승낙을 하였습니다. 오늘 김운하 사장의 노래를 듣고 보니 음악대학을 나온 성악가 이상의 실력을 가진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나, 윤이상은 오늘 이 순간부터 김운하 사장을 예술적 성악가로 인정합니다.”

1984년 4월 7일 나의 베를린 독창회는 7월 1일 프랑크푸르트 독창회 이후에 열렸다. 프랑크푸르트 독창회는 나의 베를린 독창회 개최 소식을 들은 프랑크푸르트의 공광덕 박사와 그의 부인이며 작곡가인 조병옥 여사, 당시 서독민주사회건설협의회 사무총장 김길순 박사 등의 준비로 한 독일 개신교회에서 열렸다. 독일 여러 지방에서 동포들이 몰려와서 윤이상 가곡을 비롯한 독일가곡과 한국 가곡을 들었다. 독창회 후 주최자들은 근처 ‘비너발트’닭고기 식당을 빌려 큰 잔치를 베풀었다.

베를린 독창회는 당시 뮌스터 대학 교수이면서 서독민주사회건설협의회 회장이었던 송두율 박사와 나중에 KBS이사장을 지낸 이종수 박사 등 베를린 민족 운동가들이 중심이 되어 준비, 독일 개신교회 (Ev. Christus Kirche, Hornstr, 7, 1,000 Berlin 61) 에서 ‘서백림 한국여성음악 동호회‘주최로 열렸다. 독일 유학생 양은주 피아니스트의 반주로 시작된 나의 서 베를린 독창회는 한국과 독일가곡이 불려 진 뒤 선생님의 곡 ‘고풍의상’, ‘달무리’, ‘나그네’가 끝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갑자기 한 여인이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 흐느낌은 전체에게 번졌다. 독창회가 울음바다로 끝났다.

당시 베를린을 방문 중이던 선생님의 작은 누님이 한국에서 금지되어 오래 동안 부르지도 듣지도 못했던 동생의 가곡을 듣고 그동안 억압되었던 한이 터져 나옴을 억제하지 못한 것이다. 인천 용화사의 독실한 불교 신자로 있었던 그 누님은 자신도 모르게 오래 동안 맺힌 한을 통곡으로 터트린 것이다. 동포들도 누님의 울음에 공감되어 울기 시작하다가 나중에는 서로 부등켜 안고 울음바다를 만든 것이다.

독창회날은 비가 억수로 쏟아졌다. 당시 베를린 교민 1,500여 명 중 150여 명의 청중들이 참석했다가 밖에서는 진짜 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안에서는 눈물비가 쏟아지게 된 것이다. 윤이상 선생님은 울음바다 속에서의 나에 대한 박수가 끝나자 청중들 앞으로 나와 “여러분 눈물을 거두어 주십시오. 오늘 감격스런 이날 여러분들을 교회 앞 중국집으로 모두 초청합니다. 경비는 저가 부담하겠습니다. 이 감격스러움을 함께 더 나눕시다”고 인사했다. 독창회 후의 이 축하 모임에는 당시 교회일로 베를린을 방문 중이던 오충일 목사와 나중에 서독민건을 이끈 이삼열 박사도 참석 했다.

나는 곧 이어 1984년 7월 2일 일본 도쿄에서 당시 한국인 성악가들이 꿈도 꾸지 못하는 도쿄 독창회를 여는 영광을 가지게 되었다. 도쿄 독창회는 나의 프랑크푸르트와 서베를린 독창회의 성과를 보신 대붕 선생의 추천으로 민족시보사(사장 김용원) 주최로 열렸다. 도쿄 신주큐큐에 있는 안전생명 음악 홀에서 열렸다. 반주는 3년 전에 ‘광주여 영원히!’를 지휘한 소장 작곡가 다까하시 유우지(高橋悠治)가 맡았다. 윤이상 선생님이 참석하신 나의 독창회는 600여 좌석이 꽉 찬 가운데 대성황을 이루었다. 나는 이 독창회에서 독일에서 선 보인 대붕의 ‘고풍 의상’과 ‘달무리’, ‘나그네’를 함께 불렀다. 대붕의 가곡집 달무리의 노래들이 한국에서 출판 된지 30여년 만에 독일에 이어 도쿄 하늘에서 울려 퍼진 감격은 표현 할 길이 없다.

데니스 럿셀 데이비스가 대붕 선생의 70세 생일 축하를 겸하여 ‘카브리요’현대음악 여름축제에 대붕을 레지던트 작곡가로 초청, 행사를 마치자 나는 로스 앤젤레스로 초청, 신한민보사 주최로 ‘윤이상선생 70회 생신 축하회겸 강연회’를 열었다. 이 강연회에는 대붕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항상 연주했던 일본 도후쿠 음대 아키코 다스미 교수도 동행 했다. 로스 앤젤레스의 거의 모든 동포 음악가들이 초대받아 참석했다.

1주일 동안 여러 가지 축하 모임을 개최해 드렸다. 음악계 인사들과의 교류도 만들면서 로스 앤젤레스 지방의 교향 악단들과의 연주회 개최 등을 통한 대붕의 작품 홍보와 보급계획을 추진해 드리기도 했다.

이런 음악적 인연의 쌓임을 통하여 대붕은 자신이 이사장으로 있는 ‘윤이상 음악 연구소’의 미주담당 이사로 나를 임명해 주었다. 이 이후 부터 나는 대붕이 유럽과 일본 등에서 진행하는 많은 연주행사에 미주담당이사로 초대받아 참여했다. 이 행사들 중 가장 중요하고 가장 규모가 컸던 것은 분단 45년 만에 평양에서 열렸던 ‘제 1회 범민족 통일 음악회’였다.

1990년 10월 남과 북 해외의 음악가들이 평양과 38선 비무장지대 판문각에서 가졌던 제 1회 범민족 통일 음악회에 미국 서부지역 예술단도 참여했다. 미국 전역에서 음대 교수 또는 직업적 음악가로 활동을 하던 수십 명의 한인 음악가들이 미주 동부지역 예술단과 서부지역 예술단으로 조직되어 참여 했다. 나는 미국 서부지역 예술 단원으로 참여 했다. 해외민족 대표 단장 윤이상 베를린 예술대 교수와 한국 대표 단장 황병기 교수, 단원 김규도, 윤인숙, 노동은 교수 등의 활동을 신한민보에 크게 보도하기도 했다.

대붕 선생과 나와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한국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큰 족적을 남긴 한국민주민족통일해외연합(한민련)과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의 지도부 성원으로 애국애민의 길에서 고락을 함께 한 동지였다는 것이다. 대붕 선생은 1977년에 도쿄에서 창립된 한민련의 유럽본부 의장이었고(나중에는 고문), 나는 미주 동서한민련연합 의장이었다. 우리는 또 배동호 본부 집행위원장을 포함한 8명으로 구성된 한민련 중앙집행위원회의 위원이었다. 고문들로는 유엔대사를 지낸 임창영 박사, 일본민단 단장을 지낸 김재화 선생 등이 었다. 대붕 선생은 또 1990년 12월 유럽에서 결성된 범민련 해외본부 의장이었고, 나는 같은 해 미국에서 결성된 미주 범민련의 홍보국장이었다.

대붕 선생이 1995년 11월 3일 베를린에서 별세 했을 때 나는 만사 제쳐 두고 독일로 출발, 해외 조문객으로서는 제일 먼저 베를린 교외 클라도우 한반도 연못이 있는 자택에 도착, 빈소 앞에서 목 놓아 통곡했다. 이수자 미망인을 붓 잡고 통곡했다. 당시 빈소는 대붕 선생의 제자이며 현재 베를린 윤이상 국제재단 대표로 일하고 있는 발터-볼프강 슈파러(Walter-Wolfgang Sparrer)가 지키고 있었다.

대붕 선생은 여러 가지 사건으로 별세 하시던 해 모든 운동권 직책을 사임했다. 나 자신도 여러 가지 사건으로 1999년부터 민족운동권의 모든 직책을 사임하면서 그 해 말에 민족운동권에서 은퇴를 했다. 이 상황은 후술 할 기회가 있을런지 매우 의심스럽다. 왜냐면 민족의 아름다운 미래를 위하여 통일이 오기 전 까지는 땅에 뭍어 두어야 할 일들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대학과 대학원 등에서의 5년 간의 세계 종교 연구와 미국 16개주 여행 끝에 2005년 오스트리아로 이주 했다. 그로부터 25년 간 침묵의 세월속에 살았다. 나는 4분지 1세기 동안 인륜에 위배되는 일은 하지 않았다. 민족을 생각하는 일에서 남과 북에 정도를 벗어나는 일을 하지 않았다. 장자 철학의 영향이었던가, 25년의 은둔과 침묵과 절제의 삶은 나로 하여금 이제는 사람들에게 모두 호감이 가는 부드러운 말로 이야기 할 수 있는 시기를 가져다 주지 않았나 싶다. 그동안 동포만을 위해 일한 공로로 2019년 대한민국 국민포장을 받게 된 것은 나를 많은 부분에서 더 자유롭게 만들었다. 나의 고향 마산 사람들, 나의 언론 요람지 조선일보 사람들과도 옛 정을 회고할 수 있게 되지 않았나 싶다. 정말 오랜 세월이 걸렸다.

대붕 선생의 별세 후의 일들도 이 때 까지 제대로 챙겨 드리지 못했다. 대붕과 관련된 행사가 진행될 때에는 기사 보도로서 겨우 관계를 유지해 온 셈이다. 죄송스럽기 짝이 없는 가운데서 세월이 흘렀다.

지난 2017년 ‘윤이상 선생 탄생 100주년’을 맞아 데니스 럿셀 데이비스가 몇 가지 일을 하겠다고 나서 준 것이 크게 고마웠다. 앞서서도 말했지만, 2017년 4월 8일 통영국제음악제에서 데니스는 서울시립교향악단 지휘를 통하여 윤이상 작품 ‘관현악을 위한 서주와 추상’을 헌정했다. 이에 앞선 2월 28일부터 1주일 간 미국 칼리포니아 주에서 열리는 ‘아더 마인즈’현대 음악제의 윤이상 탄생 100주년 기념으로 대붕의 바이올린 협주곡 제 2번(협연자 황유미)등 여러 작품을 연주 했다. 데니스 럿쎌 데이비스는 그 후에도 체코 브르노 필하모니 상임자로 있으면서 윤이상 첼로협주곡, 관현악 ‘영상’ 등 작품들을 연주하고 CD도 여러 개 발행했다. 베를린 윤이상 국제음악재단에서도 독일 음악가들 중심으로 2017년 3월 윤이상 100주년 기념 윤이상 작품 연주회와 윤이상 음악 학술강연회를 열었고, 2024년 오늘 에 이르기 까지 작품 연주회를 계속 열고 었다.

데니스 럿셀 데이비스가 12년 동안 지휘학 교수 생활을 할 때 양성한 한국인 제자 민정기 지휘자도 2017년 10월 잘츠부르크 모차르테움 대 강당에서 소프라노 서예리 등을 초청, 윤이상 탄생 100주년 기념 콘서트와 그에 대한 세미나 등을 개최 했다. 우리 부부가 참석하여 열심히 보도했던 일들이 생각난다.

나 자신도 대붕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오랜 침묵을 깨고 대붕 선생 곁에서 보고 느낀 스승의 고결한 인품과 훌륭한 음악, 큰 가르침을 주는 그의 민족운동의 내용과 진실을 쓰기 시작 했다. 한 평생 언론에 종사해온 나로서 현재의 상황으로선 스승의 탄생 100주년을 기리는 길로서는 이것이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었다.

이 글은 ‘윤이상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출판하려고 쓰기 시작한 것이었다. 건강이 좋지 않아 완성을 미루고 있다가 다시 시작했다. 옛 글을 새롭게 다듬고, 그 이후의 글들을 합한 것이다. 그래서 제목을 ‘윤이상 선생과의 15년, 그리고 그 후’라고 지어 보았다. 이 글이 아직도 미완성으로 남아있는 윤이상 스승의 진정한 인간론, 예술론, 애국 애족론, 도교와 불교를 통한 스승의 인류 구원론에 대한 연구에 도움이 되길 기원하면서 글을 연재 한다.

 

2024년 7월 17일
오스트리아 린츠에서

김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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