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이상의 통영과 김운하의 마산이라는 지연(地緣)과 증조부모로 부터의 나의 가계

(1) 마산(馬山)과 나 그리고 증조모부로부터의 나의 가계
같은 공간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같은 성격과 삶, 운명의 형성에 큰 영향을 준다. 한반도라는 공간의 민족 성원들과 고향을 같이 하는 동향인들의 경우가 그런 것이다. 윤이상 선생과 나의 경우도 그러한 예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통영(統營)은 나의 증조부와 조부 형제들부터, 마산은 나의 중 고등학교 시절부터 윤선생과 나와 두 가족들 간의 지연으로 얽혔다.
김형순 조부로부터 들은 이야기로는, 나의 증조부 김성구(金成九)님은 구한말 갑신혁명(甲申革命)의 주동자 김옥균(金玉均)의 동지로 혁명 성공 직 후 부산 동래부사(東來副史)로 임명 받았다. 집안의 이 이야기는 나중에 자세히 후술할 예정이다. 갑신혁명 당시 서울에서 한 달가량 걸리는 임지로 내려오던 중 갑신혁명 실패의 급보를 받았다. 급히 피신한 곳이 통영이다. 증조부와 증조모 이수선라(李水仙羅)님은 그곳에서 장남 형순, 동생 영호(英鎬) 조부 형제를두게 되었다.
몸을 숨기고 서당을 열어 생계를 이어가던 증조부는 다시 정권을 잡고 개화당의 혁명 연루자들을 찾던 수구당의 관가에서 의심을 가지고 수사를 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곧 가족들을 이끌고 마산(馬山)으로 은신 했다. 그 때 조부 형제들은 7세와 5세인 어린이들이였다.
김성구 증조부는 옛 서원들이 있었던 마산 서원 골에 서구화된 서당을 열고 후학들을 가르치면서 생계를 이었다. 그러나 2년이 되자 관가에서 수상히 보고 또 수사를 한다는 정보를 듣게 되었다. 함께 마산으로 은신했던 개화당 동지들과 함께 가족들 중에서는 자신만 밀양 방면으로 피신했다. 증조부는 한번 씩 밤중에 몰래 집으로 들렸다가 새벽에 떠나기도 했다. 그러다가 그 빈도도 멀어지기 시작했다.
이수선라 증조모는 남편의 피신 생활이 길어지면서 찾아오는 발걸음도 뜸 해 지자 형순 조부를 인천에서 살고 있는 이 에스더 여동생에게 보냈다. 여동생의 남편은 중국 상해를 중심으로 무역을 하면서 거상이 된 사람이었다. 집안에서 내려오는 이야기로는 김옥균을 재정적으로 후원한 사람이다. 갑신혁명 실패 후 그도 행방을 숨겨 말년이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당시 슬하에 자녀가 없는 외로운 집안이었다고 한다. 나중에 마산으로 언니를 따라 이사를 와서 별세한 이 에스더 동생은 당시 인천 내리교회 설립자이며 미국 감리교 선교사였던 조지 헤버 존즈(George Heber Jones:한국명 조원시-趙元時)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은 1세대 한국 기독교인으로서 교회 생활에 전념하고 있었다.
형순 조부는 이모를 따라 존즈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고 교회 학당에서 서양 기초 교육을 받았다. 존즈 목사의 추천으로 서울 배재 학당(현 배재고등학교)에 입학, 1901년 졸업했다. 미국 감리교 선교사 아펜셀러 목사가 창립한 배재 학당에는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도 먼저 다녔다.
마산 수성동 3번지에서 영호 차남을 대리고 증조부의 귀가를 기다리고 있던 증조모는 수년 후 피신을 함께 다니던 개화당 동지로부터 남편이 경남 밀양 근처에서 은거하다가 객사하였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증조모는 차남과 함께 인천으로 가서 가족이 함께 살게 되었다. 인천 내리교회에서 존즈 목사로부터 세례를 모두 받았다. 영호 차남은 서울로 가서 배재 학당에 입학, 형의 뒤를 따라 공부했다.

형순 조부는 배재 학당을 졸업, 고종 황제 황실 직영의 세관인 인천 해무관(海貿館)의 관리가 되었다. 1년이 조금 지나자 러시아 니코라이 황제 대관식에 대한 제국 대표로 참석하고 돌아 온 민영환(閔泳煥) 충정공(忠正公)이 수민원(移民廳-이민청)을 창설,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 노동자들을 모집하자 형순 조부는 인솔 통역관으로 선발 되었다.
1903년 형순 조부가 1차 출발 노동자 2,500여명의 통역관들 중의 한 사람으로 하와이로 떠나게 되자 함께 살던 증조모 형제는 재산을 정리하여 마산으로 이사 했다. 당시 배재 학당을 갓 졸업한 영호 차남이 함께 마산으로 동행 했다. 증조모 형제는 인천에서 정리해온 재산으로 노비산(鷺飛山) 청라(靑羅) 언덕 자락에 좋은 집을 샀다. 형제 이름으로 헌금한 돈으로 호주 장로교 선교회는 마산 문창교회의 화강암 신 교회당 건물을 세웠다. 나와 아내 김충자는 이 교회에 유년부 부터 교인이었다. 우리들은 나의 이사로 잠시 헤여진 후 내가 15세, 아내가 12세 때 다시 한 교인으로 다녔다. 1963년 결혼도 이 교회에서 했다.
서울 배재 학당에서 현대 디자인에 접했던 영호 조부는 마산에서 최초의 양복점인 ‘현대양복점’(現代洋服店)을 설립, 증조모님 형제를 봉양했다. 의신 보통여자학교 졸업생 오차선(吳次善)님과 첫 번 결혼, 나의 선친 유진(有振)님을 낳으셨다. 문제가 생긴 것은 증조모가 첫 며느리와 두 번째 며느리를 이혼시키고 세 번째 며느리까지 이혼시키려고 하자 영호 조부와 세 번째 조모가 일본 오사카로 피신한 것이다.
미국에서 사업에 성공하고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있던 형순 조부는두 딸만 두고 아들이 없었다. 장조카인 나의 선친을 1931년 이미 양자로 삼고 있었다. 증조모를 함께 돌보게 하셨다. 형순 조부는 동생이 어머니를 버리고 도망갔다며 형제의를 끊었다. 나의 선친도 몸을 숨긴 자신의 친부를 좋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 수년 후 에야 서로 소식을 알게 되고 다시 화해를 하게 되었다. 형순 조부 형제는 제 2차 세계대전으로 동생이 종전 그해 1945년 4월에 별세하자, 생전에 화해를 하지 못했다.
선친은 마산 의신 보통여학교 졸업생 황갑주(黃甲冑-사회 생활에서는 英淑이란 이름을 사용)님과 결혼, 장남으로 내가 태여 났다. 남동생과 그 밑으로 여 동생이 둘 더 태여 났다. 우리 집은 노비산 언덕 자락에 있었음으로 나는 거의 매일 노비산으로 놀러갔다. 산등성이에서 마산 앞 바다 합포만(合浦灣)을 내려다보는 것을 좋아 했다. 푸른 합포만 가운데 있는 돛 섬 너머로 진해만이 보이고 진해 너머로 통영이 있다. 중학시절 7촌 고모부 차현희 목사와 홍순기(마산여고1회 졸업생 초대 동창회장)고모 부부가 목회하던 용마산(龍馬山) 교회에 나가면서 용마산에도 자주 올랐다. 마산고등학교시절엔 학교 뒷산 무학산(舞鶴山)에 자주 올랐다. 날씨가 청명한 날엔 진해만 너머 아득한 수평선에 통영만이 아물거렸다.
미국에 있는 형순 조부는 해방이 되었어도 조국을 방문할 수 없었다. 이승만 박사와 독립 운등을 함께 했던 미주 독립운동사의 ‘리들리 3김’(Reedley 3 Kims)들인 김호, 김형순, 김용중은 1936년 이승만 박사와 결별, 일종의 정적인 관계에 있었다. 이분들은 미국 최대의 독립운동 단체였던 대한인국민회 북미총회(大韓人國民會北美總會)중앙집행위원회 위원장과 중앙집행위원들로서 이승만 박사의 동지회(同志會)와 맞서고 있었다. 1941년 중일전쟁의 격화로 김구(金九) 주석의 상해 임시정부가 장개석(蔣介石) 총통을 따라 중경으로 들어가자 임시정부의 결의로 해외독립운동을 리들리 3김이 주도하고 있는 ‘재미한족연합위원회’가 맡게 되었다. ‘리들리 3김’이 주도하는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 처음에는 참여했던 이승만 박사와 그의 정파는 나중에 탈퇴했다.
해방이 되자 한국 정국이 복잡해 졌다.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위원장이었던 김호(金呼)선생은 김형순 조부의 사돈이며 동업자였다. 나의 작은 고모부 김경한(金京漢)의 부친이기도 했다. 나의 큰 고모부 김용중(金鏞中)은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외교위원장 겸 상해 임시 정부 워싱턴 디.씨. 외교 대표부 대표였다. 김호와 김용중 두 분은 해방이 되자 건국사업에 참여하기 위해 서울로 귀국했다. 대한인국민회 중앙집행위원으로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재정위원장 대리였던 형순 조부는 리들리 김형제 묘목상회와 과수농장 사업을 정리하고 귀국하기 위하여 함께 귀국하지 못했다.
김호 선생을 비롯한 재미한족연합위원회 귀국대표단은 중도연합전선을 형성하고 신탁통치 수용과 남북통일 정권수립을 위해 노력했다. 이승만 박사를 지지하는 독립촉성위원회를 비롯한 우익세력들은 김구, 여운형, 송진우, 장덕수 선생 등 건국 지도자들을 암살하고, 김호, 김용중 선생 등 재미한족연합위원회 대표단을 용공 세력으로 몰아 생명을 위협했다.
하지 미 군정장관의 도움으로 미국으로 탈출해 온 김호, 김용중 등 재미 한족연합회 대표단과 김형순 조부는 대한인국민회총회와 기관지 신한민보, 영자신문 ‘한국의 소리’(The Voice of Korea:창립 및 발행인 김용중)등을 통해 이승만 독재 반대와 남북 평화통일운동을 벌였다.
이승만 정부시절 한국에 있던 우리 집안은 ‘요시찰 가정’이 되었다. 해외 여행과 해외와의 서신 연락이 일체 금지되었다. 나의 선친은 끝내 미국을 방문하거나 양부와 합류할 수 없었다. 선친은 마산에서 지청천(池靑天) 전 광복군사령관이 창단한 대동(大同)청년단 마산 지부장과 민주일보 마산 지국장, 방위군사령부 건설처장등으로 정치, 언론사업에 종사하시다가 일찍 돌아 가셨다. 나는 10세부터 민주일보 마산지사의 가판 담당자로 언론계에 첫발을 디뎠다. 마산 시내에 “민주일보 보이소!”를 외치며 신문을 판매 하면서, 광복군의 독립정신과 민주언론 정신을 가슴에 새겼다.
나는 서울 연세대학교에 입학하면서 고향 땅을 자주 밟을 수 없었을 때 까지, 노비산이나 용마산, 무학산에 오를 때 마다 멀리 통영과 동해를 건너 일본, 태평양을 건서 미국을 바라 보려고 노력했다. 보고 싶은 정과 가고 싶은 욕망을 흰 구름과 바다 바람에 실어 보냈다.
1962년 내가 언론계에 갓 발을 들여 놓았을 때 김형순 조부와 김호 선생이 박정희 대통령의 초청으로 조국을 방문하게 되었다. 당시 두 분은 처음으로 대한민국 건국 공로 대통령 표창을 받으셨다. 김호, 김용중 두분은 사후 김대중 대통령으로부터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과 애족장을 각각 추서 받았다. 김형순 조부도 사후에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을, 김덕세 조모는 대한민국 대통령 표창을 이명박 대통령으로부터 2011년 각각 추서 받았다.
1962년 여름, 서울 반도 호텔에서 애타게 기다렸던 형순 조부를 뵙게 된 것은 지금도 가슴이 뛰는 추억이다. 나는 조부를 모시고 마산 고향으로 가서 증조모 형제 산소 방문 등 여러 행사를 가졌다. 이 만남으로 나의 남동생과 막내 여동생이 조부의 초청으로 먼저 미국으로 이민을 가 자리 잡고 살게 되었다. 나는 경쟁이 심한 신문사에 방금 견습 기자로 들어가 열심히 일하고 있을 때였음으로 언론계의 자리를 좀 더 굳히고, 일단 유학을 하자는 생각이었다.
어머님과 여동생, 곧 결혼할 약혼자를 두고 있었음으로 시간이 필요했다. 조부는 당시 바쁜 일정 때문에 자신의 출생지 고향 통영은 방문하지 못하는 것을 못내 아쉬워 하면서 미국으로 돌아간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박정희 대통령은 나의 집에서 말년을 보내던 형순 조부에게 여러 번 훈장을 총영사관을 통해 보내 왔다. 나의 기억으로는 그의 집권 18년 동안, 이명박 대통령 정부가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기 전에, 대한민국 훈장 모란장과 동백장을 보내 왔다고 생각된다.
통영출신 김형순옹은 1977년 1월 25일 미국 로스 앤젤레스 근교 하시엔다 하이츠(Hacienda Heights)의 나의 집에서 91세로 영면하셨다. 장례식은 대한인국민회가 중심이 된 한인동포 사회장으로 엄수되고 리들리 공동모지에 있는 가족묘지에 안장되었다.
리들리에는 나의 조부 김형순, 고모부 김용중, 사돈 어른 김호, 조모 김덕세와 함께 이승만 전 대통령, 도산 안창호 선생, 장인환 의사, 전명운 의사 등 13명의 재미 독립운동 지도자들의 기념비가 모서져 있는 독립문 한인유산기념비각이 있다. 대한민국 보훈부와 대전 독립기념관 등에서 많은 후원과 홍보를 하고 있어 미국의 독립운동 사적지로 소개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