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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10월 16일, 금요일

4. 윤이상 선생과 15년, 그리고 그 후 – 윤이상 선생과 마산

윤이상의 통영과 김운하의 마산이라는 지연(地緣)과 증조부모로부터의 나의 가계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절의 윤이상

(2) 윤이상 선생과 마산

윤이상 선생은 1917년 9월 17일 경남 산청군 덕산면에서 탄생했다. 경남 함안군 칠원이 본관인 선비출신 아버지 윤기현(尹基鉉), 어머니 김순달(金順達)사이의 장남으로였다. 칠원은 나의 어머니 황갑주님의 본관이기도 하여 친근감을 더욱 느끼게 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이수자 여사가 쓴 저서 ‘내 남편 윤이상’에 의하면, 둘째 부인의 소생인 윤이상 대붕은 3세 때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의 본가가 있는 통영으로 가서 큰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산청군에서 태어났지만, 통영이 고향이란 것은 이런데서 연유했다.

대붕의 본가는 바닷가에 있었다. 아버지가 한 때 어장을 경영하였기 때문에 바다와 생선에 대해서는 한 평생 박학다식했다. 생선회를 좋아한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특별히 바다회로는 남해 바다에서 많이 나는 정강이 회, 민물회로는 잉어회를 둘러싼 일화는 많다. 생선회 에피소드는 나와도 많다.

대붕은 어렸을 때 아버지로부터 유교와 도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나 바로 집 앞 개신교 교회에서 들려오는 풍금소리와 찬송가에 이끌려 교회에도 출석했다. 신기한 풍금을 배우고 찬송가는 모두 외우다시피 했다. 보통학교 때는 학예회 때 마다 독창을 하는 성악도이기도 했다. 앞서서 잠시 이야기 했지만, 나중에 나는 이 사실을 알고 대붕으로부터 국제전화로 ‘달무리’가곡집의 노래들에 대한 성악 레슨을 받기도 했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더 자세하게 기록할 예정이다.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음악 공부에 열중, 16-7세 때 서울로 가출 한다. 당대 일본 제일의 작곡가로부터 배운 한국인 교사로 부터 화성학을 배운 대붕은 18세 때 그 제일의 작곡가가 후학을 가르치고 있다는 일본 오사카로 갔다. 오사카 음악원에서 그 선생 문하생으로 2년 동안 작곡을 배우고 있을 때 였다. 친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부고를 받고 장례에 참석하기 위해 귀국했다. 1937년 20세 때이다.

대붕은 통영 화양 초등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첫 동요집 ‘목동의 노래’를 출판하고 1939년 다시 도일 했다. 오사카 음악원(후에 대학으로 승격)에서 이케노치 도모지로 교수에게 대위법과 작곡법등을 배웠다. 1941년 일본이 진주만 습격으로 제 2차 세계 대전으로 돌입하자 통영으로 귀국, 지하 독립운동에 가담했다. 체포되어 옥중 생활 중 폐결핵으로 고생하면서 석방 되었다. 서울 경성제대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 중 해방을 맞았다.

대붕은 1945년 해방이 되자 통영으로 돌아와 통영 여자 고등학교와 통영 고등학교에서 음악 교사로 후진을 양성하면서 통영 문화협회 창설 등 사회 활등에도 참여했다. 교편을 잡은 곳은 부산에선 부산고교와 사범학교(후에 사범대학으로 승격)였다. 1953년 휴전으로 서울 이사 후로는 양정 고등학교 교사와 국립 서울대학 예술학부 및 덕성 여대 강사로 작곡을 비롯한 음악 교육을 담당했다.

대붕은 6. 25사변 무렵 마산에서도 한때 후학들을 가르친 것으로 들었다. 내가 알기로는 폐결핵 치료로 마산 요양병원에 왔다가 근처에 있는 성지 여고 강사로 잠시 나갔던 것이다. 당시 마산 고등학교에는 전설적인 카리스마의 이상철 교장이 시무하고 있었다. 1951년 부터 6년 동안 시무하면서 마산 고등학교 농구부와 야구부를 전국 수준으로 올리고, 서울 명문대 진학률을 크게 높이는 등 학교 발전에 크게 이바지 했다. 많은 신화를 남기고 부산 경남도 교육감으로 영전하여 간 교장이다.

이상철 교장은 특별히 문학과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다. 통영 출신 시인 김춘수, 김상옥 교사와 김남조, 이원섭, 김세익 교사 등을 국어 교사로, 일본 유학생 출신들인 피아니스트 제갈삼, 성악가 이종억 교사들을 초빙, 음악교사진을 강화 했다. 유명한 작곡가 홍난파씨의 조카로 당대 제일의 바이올리니스트였던 홍지유 선생도 강사로 초빙했다.

이상철 교장은 마침 마산에 와 있는 동향 작곡가 윤이상 교사에게 자신이 작사한 시를 가지고 교가로 작곡해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마산 고교 3년 동안 윤이상 작곡의 교가를 내내 감동 깊게 부르면서 공부했다. 나는 당시 고교1학년 때부터 마산문창교회 학생성가대 지휘자로 있었다. 마산고교 교내 성악 콩쿠르에서는 항상 3위내에 입상, 진주에서 열리는 남강 촉석루 영남 예술제 성악콩쿠르 3인 대표 출전자 중 한 사람이었다. 윤이상이라는 존함은 그래서 고등학생 때부터 잘 알고 있었다.

대붕의 마산 고등학교 교가는 하나의 훌륭한 가곡이다. 해방 후 나온 한국 각 급 학교의 교가들은 대개 기독교 찬송가 형식이었다고 볼 수 있다. 대붕의 교가는 그 자신이 예배당에 다니면서 찬송가를 모두 독파한 상태였어도 찬송가 같은 것이 없다. 대붕은 마산 고교 교가 외에 그가 시무한 학교를 비롯, 경상 남도의 3-40여 개의 중, 고교 교가를 작곡했다. 가사는 대개 통영출신 친구 시인들인 김춘수, 유치환, 김상옥 시인들의 작시들이다.

대붕의 교가들 중 특이한 점은 한 곡도 찬송가 같이 작곡된 것이 없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작곡된 이른바 ‘윤이상의 가곡’이 많지 않다는 점에서 한국시절에 나온 그의 독창적인 이 교가들을 한데 묶어 종합적으로 연구한다면, 윤이상 성악곡에 대한 다른 면모가 발견되리라고 생각한다.

대붕이 작곡한 고려 대학교 교가는 많은 에피소드를 가지고 있는 유명한 곡이다. 서울서 한 동리에 살면서 친교를 맺었던 시인 조지훈 고대 교수와의 친분으로 작곡된 이 교가는, ‘동 베를린 사건’ 이후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당시 정부당국의 교가 변경의 압력이 강했으나 고려 대학교 축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이 교가는 고려대학교 방송탑에서 학생들의 등교 때 매일 울려 퍼졌다고 한다.

통영 앞 바다 (사진: 김형국)
마산 앞 바다 (사진: 손창현)

나는 인생의 대부분을 외국에서 살면서 이상철 교장이 작사한 교가는, 이은상 작사 김동진 작곡의 ‘가고파’와 함께 마산을 대표하는 가곡이라고 생각하고 부르고 있다. 나는 마산 고교 교가를 마산 사람의 자주 정신과 기상, 정의의 사명감을 자랑하는 애국가와 같은 마산 ‘애향가’(愛鄕歌)라고 생각한다. 가사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절: 태백의 정기 내려 마재에 맺고/남해의 푸른 물결 합포에 치니/찬란한 5천년의 피를 이어서/동방의 홰를 들라 배달의 아들/청년의 큰 뜻 이 가슴에/ 자주의 정신 노래하는/마고학도 사명은 거룩하도다.

2절: 아득한 하늘가에 천마 달리고/청정한 수풀속의 송뢰 들으며/옳은 길을 밝히고 곧은 길 찾아/새 넔을 세우려는 우리의 학사/청년의 큰 뜻 이 가슴에/자주의 정신 노래하는/마고학도 기상은 늠름하도다.

제3절: 새싹이 자라나듯 고난 헤치고/샘물이 솟아나듯 끊임이 없이/묻힌 옥 숨은 빛을 갈고 닦아서/새 힘을 기르려는 젊은이 일천/청년의 큰 뜻 이 가슴에/ 자주의 정신 노래하는/마고학도 노력은 슬기롭도다.

대붕 선생과 마산의 관계에선 나의 중학교와 고등학교 시절의 인연을 첨가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마산 완월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창신 중학교에 진학했다. 창신 중학교는 호주 장로교 선교회가 창립한 기독교 학교였다. 당시 호주 장로교는 마산에 선교회를 두고, 문창 교회와 창신 초등학교, 창신 중고들학교, 의신 유치원과 의신 여자보통학교를 창립, 운영했다.

해방이 되어 한국 국공립학교들이 서게 되자 창신 국민학교와 의신 여자보통학교는 폐교됐다. 나의 증조모님 형제는 앞서 잠시 언급했지만, 문창교회 신관 건물 봉헌자이고, 선친은 창신 초등학교 수석 졸업생으로 마산 출신으로서는 제일 첫 서울 배재 고보 유학생이었다. 나의 어머니는 의신 여자보통학교 수석 졸업생으로 마산 야학교 첫 설립자였다. 나는 창신 초등학교에 입학하였다가 해방이 된 후 완월 초등학교로 옮겼다. 초등 학생시절 양복에 붉은 십자가를 수놓고 예수님의 착한 어린이로 자기를 확인 시키면서 학급 반장을 지냈다. 6학년 졸업반 때는 처음 생긴 4학년 급장 이상으로 구성된 전교 학생운영위원회 위원장이었다. 이런 연유로 중학교를 기독교 학교 창신 중학을 택했다.

1학년부터 학급 반장으로 선출되었다. 매년 학년의 수석을 했다. 앞서 잠간 언급했지만, 최인찬 교사의 이야기는 윤이상 선생과 나와의 역사, 그리고 한국 민주화 운동을 이야기 하는데서 중요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좀 더 여기서 부연하고 싶다.

최인찬 교사와의 인연의 시작은 나의 중학 3학년 때 였다. 작곡가 최인찬 교사가 음악교사로 부임해 왔다. 그는 “선생님에게 경례”하는 급장으로서의 나의 목소리를 듣고 나를 강단 앞으로 나오라고 했다. 취임 첫 날, 첫 교육 시간에 일어난 일이다. 그는 나를 보고 무조건 노래를 한 곡 부르라고 했다. 무슨 노래를 불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한 곡을 불렀다. 그는 “야! 너 목소리 좋구나, 됐다!”하면서, 내일 전교 조례 때부터 음악 교사가 선도하는 애국가 봉창을 나를 보고 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완월 국민학교 4학년 때 전교 학예회에서 한 음악극의 남자 주인공으로 노래하고 마술을 보여주는 주인공 역을 맡은 적이 있다. 당시 담임 교사는 ‘빤댓 돌’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김정기 교사였다. 숲속에서 여학생들이 선녀로 꾸미고 합창하고 있는 가운데 내가 ‘산골짝에 다람쥐’ 동요를 부르며 나타나 요술을 보여 주는 내용이었다.

당시 나는 어린 나이인데도 자라서 설교를 잘하는 훌륭한 성직자가 되거나 정치가가 되길 원하고 있었기 때문에 음악극의 주인공으로 발탁이 되었음에도 내가 가지고 있는 음악적 재능에 대하여 큰 인식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인식은 중학교에 들어가서도 마찬가지였다. 최인찬 선생이 나의 음악적 재능을 크게 일깨워 준 것이다.

나는 최인찬 교사가 부산 남성 여중고 음악교사로 영전해 가기 전 까지 아침 조례 때 마다 높은 강단에 올라가 애국가 한 구절을 선창하고 지휘를 했다. 마산 고등학교에 입학한 1학년 15세 때 나는 느닷없이 고 3학년 선배 지휘자로부터 문창 교회 학생 성가대 지휘자로 임명 받았다. 망설임 없이 받아 들였던 것은 애국가 선창 지휘의 경험이었던 때문이었다. 당시 나의 반주자는 중학 2학년 생으로 이미 성가대 반주를 맡아 있던 12세 소녀 피아니스트 였다. 이 소녀는 최인찬 교사가 지휘자로 있는 마산 YMCA 소녀 합창단 출신이었다. 이 소녀 반주자 김충자는 훗날 나의 아내가 되었음으로 최인찬 교사는 우리 부부와도 이래저래 인연이 깊었다.

최인찬 교사는 부산으로 가서 남성 여고합창단을 전국 합창콩쿠르에서 1등을 하게 하는 대성공을 했다. 동아대학 음대교수로 승진을 했다. 6.25 전쟁 시기 부산에서 부산 고교 음악교사로서, 피난와 있는 작곡가들과 함께 부산 전시작곡가 협회를 창설, 지도하고 있던 윤이상 선생은 후배 최인찬 교사를 부산에서 맞아 음으로 양으로 밀어 주었다.

윤이상 선생은 1956년 프랑스로 유학, 1957년 서 독일로 가서 자리를 잡았을 때 가톨릭 재단에 교섭하여 특별 장학금을 운영하게 되었다. 한국에서 장학금 수상자로 백병동, 강석희, 김정길, 최인찬 등 네 명을 선발, 장학생으로 독일에 초청 했다. 이들은 윤이상 선생의 제자들로서 작곡도 배우고 귀국했다. 서울 대학교와 백석 대학교 등에서 교수가 되었다. 최인찬 선생도 동아 대학교 교수로 미국 현대작곡가협회 작곡현상모집에서 1등을 하는 등 세계적인 작곡가로서도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박정희 정권이 일으킨 ‘동 베를린 간첩단 납치 사건’은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상처를 안겨준 것이지만, 윤이상 선생과 제자들 사이에도 다시 연결할 수 없는 군열을 주었다. 선생 부부가 납치당한 것은 1967년 6월 17일. 유럽에서 17명이 납치되고, 한국에서 17명이 체포된 사건으로 한국과 세계가 경악하고 여러 곳에서 항의운동이 일어난 사건이다.

나중에 한 번 해외에서 본 시각으로 이 사건을 자세하게 이야기 할 생각이다. 당시 서 독일 대통령을 비롯 세계적인 음악가, 예술인들 200여 명이 즉시 석방을 요구하는 등 구명 운동과 석방 촉구운동의 와중에서 일어 난 일이다. 서울에서 진행된 1심, 2심등 재판에서 박정희 대통령 정부는 중한 죄를 선고했다.

거듭되는 재판에서 윤 선생의 친구, 제자들이 법정에 증인으로 나와 무죄를 변호해 주는 일이 필요했다. 지휘자 임원식씨는 당시 KBS국립교향악단 상임 지휘자였고 서울예고 교장으로 안기부의 무서운 협박을 받았으나 법정에 나와 친구 윤이상을 위해 유리하게 변호했다.

그러나 윤선생의 장학생으로 독일까지 초청하여, 가르쳐서 보낸 제자들은 용기를 내지 못했다. 심지어 불리한 증언을 서는 사람들도 있었다. 우리 부부는 대붕이 살아 있을 때 우리 부부가 잘 알고 있는 최인찬 교수에 대하여 섭섭한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우리는 최인찬 교수가 타개한 지금에 와서 그 사정을 여기에 써는 것을 보류하지만, 두 사람 사이는 다시 화해함이 없이 모두 타계하였다. 두 분과 인간적인 친분을 가져 왔던 우리들로서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앞서서 간략하게 소개 했지만, 최인찬 교수는 동베를린 사건 후 미국에 있는 우리부부를 비밀리에 찾아 온 적이 있다. 최 교수는 한국 민주화운동의 지도자중의 한 사람인 마산 출신 박형규 목사의 처남이다. 김대중 대통령 정부시절 한국 민주화운동 희생자 복권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박형규 목사와 그의 목회 동지 이해학 목사는 박정희 정권의 인권 탄압과 부정 부패에 항의하는 문건들을 해외 민주운동 인사들에게 비밀루트를 통해 보내 왔다.

나는 1972년 조선일보 로스 앤젤레스 특파원으로 나와 미주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지내고 독립운동기관지였던 신한민보 발행인 겸 편집인이 되어 한국 민주화운동에 투신하고 있을 때였다. 최인찬 교수는 미국 현대음악작곡가 협회가 주관하는 현대 음악작곡 현상모집에 1등, 텡글우드 하계 음악제에서의 수상과 작품 발표회에 참석하기 위해 미국에 도착, 우리 부부를 찾아 왔다.

우리는 사제지간이도 하여 반갑게 만났다. 그는 박형규 목사가 보낸 함석헌, 박형규, 백기완 선생등이 참여한 명동 성당 부활절 3.1구국선언서와 그 후 사건의 관련 문건들, 박형규 목사 교회의 부목사로 있다가 옥중의 박형규 목사를 대리하여 저항 운동을 하다 역시 투옥된 이해학 목사의 옥중 양심 선언서 등 귀중한 민주화운동 문건들을 전했다. 우리는 거의 하루를 많은 이야기로 함께 지냈다.

그가 전하고 간 문건들은 신한민보 특종 단독 보도로 전 미국과 세계에 전파되었다. 이 사건은 지금 여기서 처음 밝히는 일이다. 최 교수는 민주화 운동에 큰 보탬을 한 셈이다. 나는 당시 윤이상 선생과는 면식이 없었을 때였다. 두 분의 화해에 도움을 줄 수 없었던 것이 지금에 와서는 크게 아쉽게 느껴진다. 이 상의 이야기를 다시 여기서 부연하는 것은 우리 부부의 미국에서의 민주화 운동이 한국 민주화운동과의 연결에 오래 동안 저지당해 왔던 것을 이제는 풀어 나가야 하겠다는 생각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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