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주동아일보 편집국장을 그만 두지 않으면 안될 불행한 일들이 생겼다. 미국에서도 한심해지는 동포 언론 지평, 중정의 협박과 공포 조성이 구조화 되어 가는 상황, 이런 일이 연거퍼 일어나면서 미주 동아에서의 생활을 도저히 계속하지 못하겠다는 심정이 깊어만 갔다. 바로 이 때였다. 남가주 대학교 대학원에서 주로 야간 시간을 택하여 공부로 마음을 위로하고 있던 나에게 삶의 방향을 크게 전환시키는 운명이 찾아왔다.
일제 시대 미주 독립운동을 주도해 왔던 대한인국민회총회의 박리근 총회장과 기관지 신한민보(新韓民報:영어명-The New Korea) 주필 황재열 목사가 찾아왔다. 신한민보를 맡아 달라고 부탁 했다. 대한인국민회 총회 대의원 대회의 결의에 바로 이어 1974년 8월 4일 나는 역사적인 신한민보의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 취임했다.
신한민보는 1905년 도산 안창호 선생이 창립한 공립협회(共立協會)의 기관지 공립신보(公立新報)와 최능익(崔能益)선생 중심으로 구한말의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대한제국의 부흥을 추구했던 대동보국회(大同保國會)의 기관지 대동보(大同報)가 1909년 합동하여 하나의 독립 운동지로 탄생한 것이다. 나의 조부 김형순(金衡珣:영어명 Harry S. Kim)이 대한인국민회 총회장 겸 신한민보 사장으로 10년 봉직한 역사와 나의 큰 고모부 김용중(金龍中)이 대한인국민회 북미총회 중앙집행위원 겸 신한민보의 영문국장으로 수년간 봉직했던 인연으로 내가 선택된 것이다.
신한민보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의 취임이 나의 인생 후반부의 방향타를 완전히 180도로 돌려놓았다. 내가 취임한 1974년 8월 4일 그 무렵엔 유신이 시작되어 반대자들이 탄압을 받은 긴급조치들이 발표되고 있었다. 언론자유수호 투쟁에 나서서 고난 속에 있는, 퇴직당하고 있는 조선, 동아의 동지들과 후배들이 외국에서나마 투쟁을 벌여 줄 것을 호소해 왔다. 나는 신한민보의 독립정신과 한국 기자 입문이래의 민주언론 창달 정신, 한국 민주화의 정신을 펼치기로 결심했다. 기자 진용과 논설위원 진용을 새롭게 구성하고 먼저 박정희 정부의 유신을 반대하는 언론의 기치를 들었다. 미국에서의 유신 체제의 철폐와 박정희 정부의 퇴진을 촉구하는 언론의 선봉에 섰다. 이 후 근 30년 동안 나는 온갖 고난과 만신창이의 수난을 당하는 언론인으로 되었다.
한국의 역대 군사정부는 나를 한국 역사와 언론의 보도에서 제외되는 인물로 지정했다. 박정희 정부 18년, 전두환 정부 8년, 노태우 정부 4년, 근 30년 동안 완전한 블랙리스트 인물로, 기피인물로 지정된 것이다. 나는 나와 함께 부사장으로 일하게 된 아내 김충자와 고생하면서 발행한 신문을 매호 마다 중요한 곳에 발송하여 훗날 역사적인 자료로나마 되도록 노력했다. 이 일은 최소한 훗날 미주의 민주화 민족통일운동의 연구자들에게 자료나마라도 남겨두자는 생각에서다. 우선 한국에는 서울대학교 도서관과 국회도서관, 미국 내로는 나의 모교 남가주 대학교(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USC)와 UCLA, UC Berkeley, Havard(연경도서관)대학, 하와이 대학 등의 각 도서관과 워싱턴 디 씨 미국 의회 도서관에 발송했다.
특별히 하바드 대학교 연경도서관과 워싱턴 국회도서관은 장기 애독자였기도 하다. 남가주 대학교 도서관은 내가 신한민보 사장으로 취임하여 최선봉으로 민주화 운동 언론을 폈던 1974년 8월부터 1983년 12월 까지의 신문을 마이크로 필름으로 제작했다. 이 필름은 남가주 대학교와 하와이 대학교, 미국 의회도서관에도 보관 중이다. 나와 아내가 공동으로 발행한 30여 년 간의 신한민보는 현재 보관 중이다. 전부가 마이크로 필름, 또는 디지털로 복사 되거나 영인본으로 출판되기를 원하고 있다.
김대중 선생이 도쿄에서 납치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1973년 8월 8일 김대중 한민통 미주본부 의장이 도쿄에서 한민통 일본본부 창립식을 이틀 앞 두고 납치된 것이다. 이에 앞서 로스 앤젤레스 “나라를 위한 목요기도회’(김상돈, 차상달, 홍동근, 명재휘, 홍윤호, 백학구 씨등 중심)에 참여하고 있던 나는 김대중 의장 후임으로 미주본부 후임 의장이 된 김재준 목사의 ‘기독자 동지회’ 운동 그룹에도 합류하게 되었다.
1975년 4월 시카코에서 열린 한민통 미주본부 총회에 참석,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곧 이어 5월께 동년 2월 8일 창립된 조국 민주회복 남가주국민회의에 가입, 운영위원이 되었다. 1979년엔 공동 의장이 되었다. 1975년 3월 19일 목숨을 걸고 미국 하원 프레이저 청문회 증인으로 참석, 최초로 미국내의 한국 안기부 인권탄압 현상을 증언했다. 당시 한국 전문학자 그레고리 핸더슨 터프츠 대학 교수와 함께 증언했다.
이 증언은 굉장한 반응을 일으켰다. 박정희 정부가 미주 민주 인사들을 탄압하고, 로비스트 박동선 등을 앞세워 미국 여러 정치인들에게 뇌물을 뿌렸던 ‘코리아게이트’사건이 폭로되었다. 나는 당시 나의 국회증언 후 암살당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내와 자녀들을 생각하고 대학 후배가 경영하는 생명보험회사의 보험에 들고 워싱턴을 향했다. 당시 워싱턴에서 살던 김대중 선생 부인 이휘호 여사의 동생 집에 유숙 하면서 미국 하원 코리아 게이트 청문회에 참석했던 일들이 꿈만 같다.
1975년 8월 17일 장준하 선생이 살해되었다는 충격적인 비보가 들어 왔다. 어렸을 때부터 한 마을에서 자라면서 그를 형으로 모셨던 홍동근 목사와 양정중학교 교장을 지낸 김정순 박사와 함께 장준하 선생 미주 기념사업회를 창립했다. 장준하 선생 암살음모사건 추적과 추모사업을 전개했다.
장준하 기념사업회의 사무국장을 맡은 나는 장준하 선생과도 인연을 가지고 있다. 나는 조선일보 국회출입 기자시절 무소속 의원들을 담당한 적이 있다. 그때 무소속이었던 장준하 의원과 여러 번 만난 적이 있다. 특별히 장준하 의원의 보좌관으로 있다가 조선일보 문화부 기자로 들어 왔던 시인 유경환과는 연세대학교 동창으로 학창 시절부터 친한 사이였기도 하여 장준하 의원을 여러 번 만날 수 있었다. 장준하 선생이 발행한 ‘사상계’의 애독자였던 나는 이 인연으로 1980년 사상계를 잇는 명분을 천명하고 ‘해외사상계’를 발행했다. 곧 이어 ‘장준하 선생 문집’을 발행하기도 했다.
진정한 고통의 삶으로 뛰어드는 사건이 일어났다. 통일운동이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나는 즉시 한국 귀국을 결심했다. 박정희 정부가 말소한 여권의 재발급과 귀국신청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나의 귀국은 당시 보안사령관과 중정부장을 겸임한 전두환 군부의 12.12 쿠데타로 좌절되었다. 한국사태의 원인이 밝혀지고 새로운 민족운동의 필요성이 대두 되었다.
1980년 1월 3일 나는 신년사설을 통해 민주화와 통일을 하나로 보고 통일운동을 추진한다는 것을 선언했다. 동일자로 장준하선생의 사상계를 계승한 해외사상계를 월간으로 발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 부부는 신문사에 간단한 인쇄시설을 갖추고 해외사상계의 인쇄와 발행을 직영했다. 인쇄인의 이름은 아내 김충자 였다. 솔직한 말로 통일 운동이 그렇게 큰 고통과 수난을 가져올 것을 미리 알았다면, 우리가 그 일을 시작했겠는가 할 정도로 우리는 고통의 아픔을 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고통 속에서 예수가 산상수훈에서 말한 공의를 위한 자, 애통 하는 자.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 자의 뜻과 기쁨을 안게 되었다.
한민족의 통일에는 피가 요구된다. 오늘날 기독교가 2,000년간의 순교자의 피로 이룩된 것과 같이 한민족의 통일운동도 찬란한 미래의 통일한국을 위하여, 찬란한 인류 구원의 미래 민족으로의 현현(顯現)을 위하여 순국의 피가 요구된다. 그러나 이 순국자들은 순교자들과 같이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순교자 대열에 서게 될 것이다. 이 믿음을 우리는 통일의 그날 까지 지키고 나가야 한다.
생전에 일어 날 것 같지 않았던 사건이 일어났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의 피살사건 이후 전두환 군부의 쿠데타가 일어났다. 김대중 선생 등 민주, 야당인사 26명을 내란선동 정부 전복음모 등 죄로 구속했다. 김대중 선생 등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군부독재 규탄과 구속인사 석방을 촉구하는 시민들을 학살하는 광주 5.18민중항쟁이 일어났다.
일본에서 전두환군부의 만행을 규탄하고 김대중 의원 등 구속자들 석방 운동을 시작한 일본 한민련 본부의 배동호 상임 의장과 조활준 사무총장, 김대중 선생 긴급구출위원회 김종충 위원장 등 3명이 1980년 6월 23일 로스 앤젤레스 공항에 도착했다. 배동호 의장이 조국민주회복 남가주국민회의 김상돈 상임 의장에게 전화를 해 왔다. 당시 공동의장들이었던 나를 포함한 김상돈, 차상달, 김기성씨 네명이 급히 공항으로 갔다.
배동호 의장은 유럽에서 열린 국제사회주의연맹(The Socialist International:약자 ‘SI’)총회에 참석, 전두환 군부의 만행을 알리고, 김대중 의원 등 구속자 석방지원을 호소하고 일본으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말했다. 베를린의 윤이상 선생등이 유럽 활동을 함께 했다고 했다. 배 의장은 일본으로 가는 비행기 환승 시간을 이용하여 미국 입국이 어려운 사정이라 모처럼 가지게 된 귀중한 시간을 활용하자는 생각을 했다고 했다. 그는 미국에서 수고하는 존경하는 민주화 운동 인시들에게 인사드리고 싶어 무례한 청을 드렸다면서 양해를 구했다. 우리들은 공항당국에 부탁하여 환승객 대합실로 가서 배동호 의장 일행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그러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긴 이야기는 나누지 못하고 헤어졌다. 꿈같은 만남이었다.
양준용 박사로부터 배동호 의장의 초청 친서를 받았을 때 내가 즉답을 할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배동호 의장은 로스 앤젤레스의 공항 만남에서 미국 서부의 애국 운동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고 나와의 연결점을 만들어 보고 싶다는 것도 일본 초청의 이유였을 것이다. 그러나 양준용 박사에게 즉답을 할 수 없는 이유가 미국 서부운동권에 있었다.
김상돈 전 서울시장을 중심으로 한 보수적인 서부의 운동가들이 뉴욕 동부지방에서 1977년 6월 창립된 진보 연합체 미주민주국민연합(미주민련:임창영, 로광욱, 지창보 박사 등 중심)을 일종의 좌익계로 보고 반목하고 있었다. 미주민련은 1977년 8월 일본에서 창립된 민주민족통일해외한국인연합(한민련)에 이미 참가하고 있었다. 내가 공동대표위원으로 있는 조국민주회복남가주국민회(약칭:국민회의)는 1976년 3.1구국선언사건 후에 서울에서 창립된 민주주의 국민연합의 정신을 받들어 미국에서 생긴 민주주의 국민연합 북미본부(김재준, 김상돈, 한승인 등 기독교 지도자들 중심)와 연합하고 있는 우파계라고 할 수 있었다.
미주 서부의 보수 운동권은 일본 한민통과 한민련 자체 까지도 좌익계로 보고 연대를 꺼리고 있었다. 국민연합 북미본부는 1976년 12월 조국민주회복 남가주 국민회의 등 우파계열의 연합을 확대, 로스 앤젤레스에서 한국민주화운동연합을 창립 했다. 중심인물들은 김재준, 김상돈, 차상달, 이용운, 한승인 등이었다. 진작 1973년 7월 카나다를 포함, 위싱턴 디 씨 에서 전미 조직으로 창립되었던 한민통 미주본부는 당시 진보계와 중도계가 다 빠져 나가고 김대중 창립자를 충성으로 받드는 보수 계열 소수자들의 단체로 남아 있었다. 한민통 일본본부와는 거의 단절하다시피 하고 있었다.
미주 운동권의 이러한 지각은 오래갈 수 없었다. 박정희 대통령 피살사건과 5.18광주민중항쟁, 전두환군부의 등장은 미주 민주화운동의 방향에 큰 전환을 초래했다. 한국 독재정권의 연속에는 미국이라는 외세와 분단의 지속이라는 문제가 먼저 강조되었다. 나이 많은 명망가 중심의 운동에서 이론과 기술을 갖춘 젊은 세대로의 운동 중심이 옮겨져야 한다는 문제가 뒤 따랐다.
미주 운동에서 선민주 후 통일론과 선 통일 후 민주론, 민주와 통일 양면 동시론의 논쟁이 진행되다가 3자간의 편 갈이가 시작되었다. 장년과 청년지도자들이 나서고 새로운 단체들이 생겨났다. 한국 민주화운동연합과 한민통 미주본부의 다수파가 남북 두 독재 비판, 선 민주 후 통일론으로 통합 하면서 조직 내에 북한 비판 반대자 내지 유보파들을 골라내기 시작했다. 미주 민련의 진보계는 선 통일 후 민주론과 민주-통일 동시론을 종합 하면서 외연을 확대해 갔다. 이 두 가지 방향은 점점 서로 다른 방향으로 확대되고 있었다.
나는 일단 민주와 통일 동시 진행론의 입장에서 언론 활동과 자체적인 조직 활등을 확장하고 있을 때였다. 신한민보와 해외사상계를 통한 새로운 민주-통일노선과 활동으로 많은 인재들이 기자와 논설위원으로 몰려들었다. 한국운동권 출신 청년들도 모여 들었다. 나를 중심으로 한 언론, 민주 통일운동은 거의 비공개적으로 진행 되었다. 신한민보사는 미주 서부 운동권의 본부처럼 되었다. 지사를 비롯한 다목적의 조직은 뉴욕 등 동부까지 확장되었다. 운동권의 회의, 집회 등 많은 부분이 신한민보를 통해 진행되었다.
내가 공동의장으로 있는 조국민주회복 남가주 국민회의는 당시 김상돈 전 서울시장을 중심으로 하는 보수파와 차상달 미국 케이커교회 전국위원회 서기로 있는 차상달 선생을 중심으로 한 진보파로 나뉘어져 있었다. 내가 일본 도쿄 김대중 선생 긴급구출대회 미주 서부 대표로 간다는 것은 그동안 중도로 양파의 무게를 평행으로 유지시켰던 남가주의 운동권 양상을 크게 바꾸는 일이기도 했다.
나는 고민 끝에 일본으로 가기로 결심했다. 나는 양준용 박사의 일본대회 초청건을 국민회의 공동 의장 회의에 상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전에 개인적인 접촉과 설득으로 많은 노력을 기우렸다. 원로, 선배 공동 의장들의 고마운 양해를 일단 받게 되었다. 나는 곧 이어 나와 가장 가까운 국영길 공동 의장을 함께 가자고 설득 했다. 국 공동 의장은 나성교포문제연구회 회장과 신한민보 주필을 겸하고 있는 공동 의장으로서 나와는 가장 가까운 동지였기도 했다. 나 보다 2년 전 소장 층을 대표하여 공동 의장이 되어 있었다. 우리들이 함께 도쿄를 향해 떠난 것은 1980년 8월 11일이었다.